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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첩(비와 첩, 서예전과 정성환 미술문화원, 1984, p225)

雅嵐 2011. 1. 15. 12:07

碑의 유래

 

  書의 연구에 있어서 기초적 자료가 되는 것은 ‘金石文字’이다. 금속류에 남아 있는 문자를 金文이라고 하고 돌에 각이 되어 있는 것을 일반적으로 石文이라고 부르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해서 금석문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금석문자를 탁본하여 자료로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 곧 우리가 오늘날 範本을 삼는 碑帖이다. 비첩은 이것을 하나의 단위물로 지칭하는 경우와 비와 첩으로 구분해서 부르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런데 비첩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탁본이라는 대명사로서의 의미 외에 각각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서 지칭한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단순히 學書의 본으로 삼기 위해 금석문의 탁본을 뜬 것은 따로 碑版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비와 첩은 그 발생부터가 다른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통상적으로 말하는 비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죽은 이의 공적 등을 새겨 묘 옆이나 그밖에 눈에 잘 뜨이는 곳에 세워놓은 돌을 말한다. 그러나 원래의 비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금석문자는 학문 연구 상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단편이라도 탁본을 떠서 참고하게 마련이다. 또한 고인의 묵적이라도 무엇인가에 각이 되어 있는 것이라면 금석문과 마찬가지로 탁본을 하여 활용 보존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남겨진 자료를 가리켜서 단순히 비첩이라고 할 때는 이것을 한 단위물로 지칭한 경우 즉 ‘비를 탁본한 책’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三代시대에 있어서 비라고 하는 것은 天子가 있는 궁중어전 앞에 세워놓은 돌기둥을 가리킨다. 돌기둥을 어전 앞에 세운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 石柱를 이용해서 시각을 측정했던 것이다. 마치 해시계처럼 석주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상태를 보고 신간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그림자의 이동에 따라 동서남북의 방위도 알 수가 있었다. 아침에는 그림자가 서쪽에 생기고 저녁이 되면 동쪽으로 옮겨진다. 또 대낮이라면 그림자가 북쪽으로 비치니 이것으로 대체적인 방위를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종묘제사에 관련된 용도가 있다. 제를 지낼 때는 천자나 제후 등 신분에 따라 모두 희생물이라는 것을 바치게 마련이다. 제물로는 羊 그 밖에 동물들이 있는데 천자는 소를 산채로 하여 제물로 삼았다. 이런 희생물로 끌려온 동물을 붙들어 매기 위해서는 기둥이 필요했던 것이다.

 

  셋째로는 장례시의 용도가 있다. 관을 땅 속에 묻을 때는 관이 무거워 추스르기가 힘들다. 더욱이 천자의 관 쯤 되면 크기도 대단할 뿐 아니라 무덤도 매우 깊어서 인력만으로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묘혈의 네 모퉁이에 큰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둥 위쪽에는 구멍을 뚫어 거기에 굵은 밧줄을 넣어 연결시켰다. 이 밧줄도 보통 줄이 아니라 지경이 二寸 三寸에서부터 굵은 것은 四寸 五寸이나 되는 엄청난 것이다. 사방으로 연결된 이 밧줄을 이용해서 관을 차분하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세워진 기둥이 곧 비이다. 특히 굵고 큰 나무기둥을 豊碑라고 하는데 이것은 주로 천자의 관 같은 것을 추스를 때 사용되었으며 그밖에 제후의 것으로서 관이 작은 것은 비도 두 개정도만 세우든가 하여 신분에 따라 양상이 달랐다. 이때의 비는 물론 나무이다.

 

  그런데 후에 이 비에 글을 쓰는 풍습이 생긴 것이다. 漢劉熙가 만든 「석명」에 ‘碑는 被이다. 이는 왕의 葬時에 설치되며 녹로(轆轤:높은 곳이나 먼 곳으로 무엇을 달아 올리거나 끌어당길 때 쓰는 도르래)로 줄을 그 위에 被하여 관을 이끈다. 臣子는 君父의 功美를 追述하여 그 위에 적는다. 후인이 이를 따르다. 이는 도로의 한 모서리나 확실한 곳에 세웠다. 그 文을 이름하여 碑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즉 신하나 제후의 아들들이 군부의 유덕을 흠모하여 그 공적을 기리 남기기 위해 그 사실을 적은 것을 곧 ‘비’라고 하였다.

  그것이 후세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석비가 되어 거기에 공적이나 기념될 사실들을 새기게끔 된 것이다.

 

  돌에 공적을 새긴 것으로는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순회하면서 세운 嶧山碑(역산비)나 泰山碑 외에 瑯琊臺刻石(낭야대각석)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가 시황제 스스로 자신의 업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만든 유명한 비들이다.

 

  그러나 이같이 돌에 각을 했다고 해도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비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史記의 「시황본기」에는 ‘서 있는 돌에 각을 하다.’라고 하여 ‘비에 각을 하다.’라고는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사기에 의하면 적어도 秦시대 까지는 글자를 팠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비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그 당시까지는 조정에 세워놓고 해시계로 쓰거나 종묘에서 제물이 될 짐승을 매어두거나 또는 관을 묻을 때 사용하는 그러한 의미의 것을 가리켜서 비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문장을 새겨 오늘날 일컫는 것과 같은 비의 형태를 이룬 것은 한 이후의 일이다.

 

  참고로 漢石碑의 윗부분에 있는 둥근 구명과 관련하여, 이 구멍을 穿(뚫을 천)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묘혈에 관을 넣기 위해 뚫은 바로 그 구멍의 모습이다. 한편 그 옆에는 움푹 패인 모양도 있다. 이것을 暈(무리 훈)이라고 하는데 이 또한 밧줄 때문에 생긴 흔적인 것이다.

 

 

<帖의 유래>

 

 

  한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종이가 없었다. 채륜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漢시대 이전에는 적어도 종이가 없었던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흰 천에다 글씨를 썼는데 이것을 첩이라고 하였다. 설문의 「帖」字 註에 ‘帛書暑也’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帖’자의 扁인 ‘巾’은 곧 ‘布’를 가리킨다. 그런데 포가 아닌데다 글씨를 쓰는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국가적으로 사안이 중요한 것으로서 영구히 전할 필요가 있는 것은 천보다도 한층 견고한 죽간이나 목찰을 이용했던 것이다. 죽간에는 漆로써 글씨를 썼으며 목찰에는 주로 칼로 각을 했다.

 

  고대로부터 천자제후의 곁에는 반드시 太史라는 서사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대사건이 생기면 즉시 그 사실을 기록에 남기게 되는데 이 같은 기록이 죽간이나 목찰에는 많다. 또 이외에 성현이 만든 사서오경 같은 저작도 소중하게 보존하기 위해 죽간에 칠로써 쓰게 된다.

  이러한 소찰들은 하나하나 가죽으로 꿰매어 연결시켜 놓았는데 이 같은 연유로 지금도 서적을 ‘권의 일.’ ‘권의 이’ 하고 분류하는 관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편 책이라고 하는 것도 이같이 종으로 이어진 소찰이라는 뜻에서 생긴 문자이다.

 

  결국 첩은 평상시의 용도를 위해서 일일이 목찰에 칼로 새기거나 쓰는 것이 번거로운 탓으로 손쉽게 통상용으로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첩은 그 후 명적을 탁본하여 학습의 본으로 삼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을 가리켜 법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귀중한 명적들은 모두 각을 해서 보존하게 되는데 이 각을 탁본한 것이 곧 법첩인 것이다. 따라서 비첩이라고 하면 금석문을 탁본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된다.

 

  송의 태종이 翰林侍書王著에게 명하여 옛 명적들을 각을 해 가지고 10권의 책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淳化閣帖이다. 순화 3년에 완성되었다 하여 이렇게 부르는데 이것은 集帖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필적을 모아 책으로 엮을 경우, 개인의 필적 한 종류를 탁본하여 묶은 것은 單帖, 두 종 이상을 모은 것은 專帖, 여러 사람의 것을 모은 것은 集帖이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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