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초 서예관 http://yeochomuseum.kr/
正法을 찾는 서예가 如初 김응현(뜻이 제대로 서야 붓도 설 수 있습니다)
*1985년 여성동아 인터뷰(글.김명숙/사진.권부문기자) 기록
*여초 김응현 약력
-1926년 서울 번동 출생
-아호.여초(如初), 무외헌(無外軒), 배석장실(拜石丈室), 완옹(頑 완고할 완, 翁 어르신 옹) 등..
(이건 제 의견 : 그리고 돈옹(頓翁)을 쓰시는 데, 頓은 두가지 뜻이 있더군요. 연세가 더해가시면서, 겸손함으로 '조아릴 頓', 아래 기사를 읽다 보면, 서예기법으로 '붓 끝에 힘을 주어 빳빳하고 굳세게 눌러 긋는 법의 頓'으로 선생님의 필법을 의미한 두 가지 뜻으로 쓰시지 않았을까 합니다. '여초'를 두가지 의미에서 쓰신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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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거의 그 맥이 끊겨버린 한국 서예계에서, 드물게 학구적인 자세와 서예의 정법 확립을 위한 노력으로 주목받고 있는 여초 김응현(59).
호방하고 기개있는 글씨로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동남아 등 한자문화권내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지난 12월 8일에서 22일에 걸쳐 6번째 개인전을 가져 관심을 끌었다
이마미술관의 초대전으로 열렸던'여초 김응현갑자전(如初金膺顯甲子展)'에 광개토왕비체의 육폭대병(六幅大屛)을 비롯하여 주로 행서체로 쓰인 한국역대명현들의 문장과 가언 50여점이 전시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앞서 말한 광개토왕비체의 육폭대병. 이것은 매월당 김시습의 장시 <殘燈餘一寸>을 광개토왕비체로 쓴 것인데 우리민족만의 고유한 서체인 이 체는 지난 전시회를 통해 국내에서는 최초로 선보이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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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비체 선보여
"광개토왕비의 서체에는 전서.예서.해서의 3가지 글씨체가 모두 융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민족의 기초서법으로서 훈민정음원본체와 그 원리가 같지요. 시간상으로도 천년정도가 격해있는 데다. 하나는 한자고 하나는 한글인데도 불구하고 서법의 원리가 같으니 그야말로 우리민족의 근기가 배어있는 서체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난번 그가 선보인 매월당의 장시는 광개토왕비체의 임모(臨模)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체의 특징을 자기화한 독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광개토왕비체의 감각이나 뜻(筆意)을 가지고 쓴 것이지 그것과 똑같은 모양의 글자들을 모자이크한 집자(集字)는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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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초가 지난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준비한 기간은 불과 보름남짓.
지난 11월초 자유중국 행정원 문화건설위원회 초청으로 '안진경 서세(逝世) 천 2백년 기념 국제학술연토대회'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후 갑작스럽게 전시회 개최가 결정되는 바람에 시일이 촉발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러나 여초는 촉박했던 시일에 대해 별로 괘념치 않는데 그것은 '한 전시회를 위해 몇년씩 준비기간을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그의 평소의 지론과도 맥이 통한다.
그에 의하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작가의 작풍을 전시회를 통해 가장 최선으로 보여주려면 전시회 일정에 가장 근접한 시기에 제작된 살아있는 작품을 보여주어야지 이미 흘러가버린 몇년전의 것을 전시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
30성상이 넘는 세월을 붓 하나 다부지게 움켜잡고 살아온 김응현. 어느덧 60고개를 바라보는 그의 신년소감은 어떤 것일까?
"새로운 해이니만큼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희망차게 전진해야겠지요. 제게 있어 지난 84년은 유난히 힘들고 복잡했던 한해였어요. 힘들고 복잡했던 만큼 새해는 더욱 희망을 가지고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망년(忘年)이 아니라 송년(送年)을 하고 싶어요. 지난 경험을 잊어버리기보다 그것을 '과거의 교훈'으로 삼아 항상 더 나은 앞날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면 85년 총선에서 깨끗하고 배짱있는 사람들이 많이 선출돼 국회가 제기능을 다했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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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품 . 천질 . 노력'의 글씨
여초는 각 서체에 능하나 특히 행서에 뛰어나며 '담솔(淡率)과 우직(愚直)이 들어있고, 인품.천질(天質).노력이 삼위일체된 글씨'를 쓴다고 평가받고 있다.
'글씨를 쓸 때는 마음이 구속을 받아서는 안되고 호탕하고 자유스러워야 하며 안정이 되어있어야 한다'는게 그가 말하는 서예가로서의 바른 마음자세.
"붓은 생동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붓을 잡았을 때는 다섯손가락안에 모든 체력과 정신력이 경주되어야 해요. 집필(執筆)과 운필(運筆)의 경우에도 글씨에서 '서슬'이 묻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운필의 경우, 칼끝보다 예리한 필봉에 중심이 잡혀야 글씨에 기(氣)가 어릴 수 있는 것이죠. 어느 글자라도 그 첫획과 마지막획의 기맥이 상통해야 하며 열자, 천자를 쓰더라도 첫자의 첫획과 마지막자의 끝획이 또한 서로 통해야 비로소 활기찬 글씨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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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듯 여초 김응현은 역시 서예가로 이름을 드날리고 있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의 실제. 서울이 고향인 여초는 5형제중 네째인데 둘째형님인 일중 뿐만 아니라 작고한 장형 김문현(金文顯), 세째 형님인 김창현(金彰顯,창문여고교장)도 서예에는 조예가 깊어 명실상부한 서예일가를 이루고 있다.
여초형제들은 어렸을 때 조부나 친부로 부터 글을 배우면서 붓을 잡기 시작했으나
특정스승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예수업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한다. 즉, 어느정도의 기초를 가지고 '나름대로' 공부해(여초는 바로 이 점이 현재 한국서예계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무사자통(無師自通)한 셈이라는 것.
"스승없이 혼자 공부한다는 점에는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스승을 통해 알게 모르게 전해질 누습(累習)에 젖지 않을 수 있다는 점하고 혹시 그릇된 서법을 지닌 스승을 만날 지도 모르는 불행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죠.
단점으로는
자신이 아무리 혼신정진을 했다해도 과연 정법(正法)에 이르렀는지의 여부를 확실히 판가름할 수 없다는 것이겠죠"
그러나 '84년 7월 내가 중국대륙에 들어갔을 때, 마침 여초선생님의 작품을 휴대하여 대륙작가들에게 보였었다. 대륙의 노대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서법(書法)의 정통적인 작품이라고 극구찬양하는 것을 직접 들은 바 있다'는 명지대 진태하(陳泰夏)교수의 얘기를 듣고보면 여초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자라면서 '서예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가져보지 않았던 여초가 진지하게 서도(書道)에 입문(入門)하게 된 것은 휘문중학교 학생 시절. 일제치하에서 일본사람들에 의해 옥고도 치렀던 그는 해방 얼마전 일경의 눈을 피해 조부와 함께 도봉산에 피신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안진경, 구양순 등의 글씨가 실린 법첩(法帖)을 들고 들어갔던 것. 그는 거기서 한획을 연습하는데 보름 내지 한달의 기간이 소요될 정도로 서예에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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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와 고집의 서예인
그러나 '고려대 영문과 졸업'이라는 학력이 말해주듯 외국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왕성한 지적욕구는 8.15 해방과 더불어 그의 손에서 붓을 빼앗고 만다.
"휘문중학에 다닐 때도 시와 수필에 관심이 많았어요. 한 때는 시인 정지용씨가
<문장>지에 나를 추천하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그는 또 9.28수복 후 국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국회보>를 편집하는 일을 맡기도
했는데, 그때 부산에서 국회도서실을 창설하는데 앞장섰던 일화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당정권과는 마음이 안맞아 국회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 일을 그만둔 후에도 그쪽에서 고문 비슷한 자리를 내주어서 한가하게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초는 결코 둥글둥글 원만한 사람은 아니다. 불의라고 생각되거나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면 여초 특유의 오기가 발딱 꼬챙이처럼 솟는데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그런 성격이 글씨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게 주위사람들의 말.
재미있는 일례로 여초는 양복을 입을 때면 삼복더위에도 꼭 넥타이를 매는데, 그것은 자유당시절 창랑 장택상이 그에게 '일할 때는 노타이 차림으로 하라'고 종용한 데 대한 반발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라니 가히 그의 오기와 고집을 알만하다.
어찌됐든 그의 한가한 직장생활은 다시 한번 그를 서예의 세계로 이끌게 된다. 어느 분야나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전쟁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한국의 서예계도, 가뜩이나 일제치하에서 황폐해진 것이 더더욱 형편무인지경으로 절단이 나버렸는데 바로 그점이 여초를 잡아끌어 그때부터 그는 서예전문서적을 통한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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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호가 '여초'아닙니까?
세상사람들이 하도 처음과 끝이 같지 않아 그렇게 지어본 것인데 여(如)자에는 '같다' 는 뜻 외에도 '간다'는 뜻이 있거든요. 즉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한다는 뜻도 되는 거지요"
이렇다 할 스승도 없이 북위시대(北魏時代)의 해서(楷書)와 행서(行書)등을 연구하며 글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그저 되는대로 살려고 했던' 그를 오늘날의 '서예가 여초'로 만들어 버린 것.
그가 첫번째 개인전을 가진 때는 1965년.
그리고 74년 대만에서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초청으로 '한국동방연서회방화기념전(韓國東方硏書會訪華紀念展)'을 가지면서 중화민국을 비롯한 한자문화권내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국내는 물론 중화민국. 일본. 홍콩. 싱가포르.말레이지아 등 동남아에서 전시회를 가질 때마다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1만여명의 회원을 포용하고 있는 <동방연서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1956년에 조직된 이 서예단체는 무질서하고 흐트러진 서예풍토에서 '서법의 정법을 찾자'는 취지 아래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면서 현재 국내 최대의 서예단체로 부상했다.
여초는 '글씨 쓰는 시간보다 서법에 대한 전문서를 읽고 원고쓰는 시간이 더 많다'는 말을 들을 만큼 부단히 연구노력하는 서예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런 평가에 걸맞게 1971년에는 전 6권으로 된 <동방서예강좌>를 출간하기도 했고 1973년에는 <서통(書通)>이라는 서예전문잡지를 창간, 적자를 무릅쓰면서 10호까지 발간하는 열의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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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이 생동하는 글씨라야
과연 어떤 글씨가 좋은 글씨인가?
이것은 문외한들이 어쩌다 서예전시장에 들러 작품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한번쯤 품게 되는 의문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 여초는 우선 '붓이 제대로 세워진 상태에서 글씨가 쓰여졌는가'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붓이 제대로 서 있어야 글씨에 생동감이 넘치고 획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또 글자의 획이 종이를 파고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어야지 발라놓은 것 같으면 안돼요. 획이 탁하지 않고 유창, 통창해야 하되 또한 미끄러지지 않아야 합니다.
창고(蒼古)해야지요. 또 글씨에 격이 나타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해서 배추로 따지자면 고갱이라야지 우거지여서는 안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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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글씨 쓰기를 이르는 말에는 서도(書道)라는 말이 있고 서법(書法)이라는 말이 있으며 또한 서예(書藝)라는 말도 있다. 동양의 오묘한 향취가 절로 풍겨나는 이 세 단어는 각기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다 같은 말입니다. 다만 서도라는 말은 일본사람들이 많이 쓰고 서법이라는 말은 중국사람들이 많이 쓰며 서예라는 말은 우리가 많이 쓰지요. 그런데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서예'의 '예'는 손끝의 잔재주나 기(技)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자가 '遊於藝'라고 했을 때의 '예'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예를 일종의 기예로 알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 서예계가 요모양 요꼴이에요."
말을 마친 여초는 '창고하며 진솔(眞率)하고 고졸(古拙)한, 활(滑 미끄러질 활)하지 않고 삽(澁 떫을,껄끄러울 삽)한 글씨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심수쌍창(心手雙暢), 심수상응(心手相應)해야 한다'며 한참동안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또 그는 정법(正法)에 어긋남이 없는 글씨를 이루기 위해서는 '의선필후(意先筆後)'라는 말이 가리키듯 먼저 글쓰는 이의 사상과 인격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며 말을 이었다.
"서예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글쓰는 이의 사람됨이 여실히 표출되는 예술입니다. 글씨쓰는 사람이 속기(俗氣)에 젖어 있다면 절대로 문자향(文字香)이 나올 수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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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는 직업인 일 수 없어
요즈음에는 서예를 배우려는 주부들의 열기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그들을 향해 여초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우선 붓도 제대로 세울 줄 모르면서 성급히 발표하려고 해서는 안되죠, 서예를 허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단 말입니다. 우리 동방연서회도 회원전을 그렇게 자주 하고 있지 않아요. 글씨쓰는 사람이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허영'과 '공부 안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은 젊은 서예가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글씨를 몇십년간 써도 몇해 안된 그림 그리는 사람보다 살기가 힘든 것 같다'고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를 향해 여초는 '추사 알지? 추사글씨가 단원그림보다 평가를 못받고 있다고 생각하나?'고 묻곤 "너는 어째 글씨를 '그리는' 단계를 아직도 벗어지지 못하고서 불평만 일삼느냐? "고 야단쳤다고 한다.
"글씨쓰는 사람은 '내가 굶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근심에 사로잡히면 안돼요.
글씨써서 돈벌겠다는 생각은 말아야지요. 그리고 저 스스로 고심참담 연구정진하면, 순수한 마음으로 노력만한다면 어떻게든 밥먹고 살게끔 되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람사는 사회의 원칙입니다. 그리고 서예가는 직업인일 수가 없어요. '프로 서예가'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프로가 되려면 '쟁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면 글씨가 안됩니다. 모든 고통을 다 겪고 모든 사상에 두루 정통해야 인격이 다져지고 인품이 쌓여 제대로 글씨가 되는 것아닙니까? 예를 들어 프로야구인을 한번 살펴봅시다. 그는 다른 아무것도 안하고 매일 야구연습만 하면 훌룽한 야구선수가 될 수 있지요. 그러나 글씨쓰는 사람이 아무일도 안하고 방구석에만 박혀 노상 글씨만 쓴다고 해서 제대로 글씨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글씨란 인격이나 인품없이 노력이나 천재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말을 마친 여초는 글씨에 천재는 없다며 '사람과 글씨는 함께 늙는다(人書俱老/함께 구)'라는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50대 이전의 글씨는 제 스스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고 전제한 그는 자신의 경우도 '작년의 글씨와 올해의 글씨가 달라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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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씨는 '되어지는 것'
여초는 혹 그의 글씨에 대해 어떤 미흡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미흡함을 느끼고 있지요. 어느 누구도 죽기전에 완전한 글씨를 쓰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미흡함을 느껴도 할 수 없습니다. 아둥바둥 고치려고 노력하지는 않아요. 현단계는 현단계대로 충족된 의미가 있는 법 아닙니까? 앞으로 일년후에 올 단계를 미리 끌어당긴다면 그만큼 빨리 죽을 것 아녜요? (웃음) 내가 붓을 든 그 순간 가장 순수한 마음과 정성으로 나의 총역량을 압축해서 글씨를 통해 나타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것이 잘됐느냐 못됐느냐 평가하는 것은 감상자들의 일일뿐 나와는 상관이 없지요"
같은 맥락에서 여초는 자신은 결코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갖고 글씨를 써본적이 없다고 강조했는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글씨를 쓰면 결코 자연스러운 글씨가 될 수 없다고 부연.
"우연욕서 득의작(偶然欲書 得意作)이라는 말이 있듯이 진짜 작품은 '되어지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서예에서 일점일획(一點一劃)의 개필(改筆)이나 가필(加筆)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 있어요"
그의 설명을 듣다보면 '서예는 순간을 통한 영원의 예술'이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이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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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에 기상, 하루에 보통 3~4시간씩 붓을 잡는 여초는 지금까지 그가 써온 작품 중에서 다음의 3가지를 가장 아끼고 있다.
첫번째는 1967년 파고다 공원에 새긴 <독립선언서>휘호이고 두번째도 역시
1979년 3.1절에 맞춰 일본에서 전시한 <독립선언서>인데, 전자의 경우 한자는 진흥왕순수비체 한글은 경서언해체로 쓴데 비해 후자는 광개토왕비체와 훈민정음원본체로 써 독특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진흥왕순수비체와 경서언해체, 또 광개통왕비체와 훈민정음원본체는 서로 그 기맥이 상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세번째 작품은 지난 전시회에서 선보였던 매월당의 장시라고 한다.
글씨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서예가들이 '좀더 아름다운 서체' '현대감각에 맞는 참신한 서체' '글자디자인의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서체'를 연구개발하는 데도 힘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초는 '새로운 아름다움이든 신선한 감각이든 그것이 서예가의 필봉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라야지 의식적으로 조작(造作)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서예를 맨처음 배우려는 사람에게 그가 권하는 말은
우선 정통필법을 완전히 자기것으로 하라는 것. 그리고 그 후엔 그것으로부터 떠나야 하는데 이것을 한마디로 간추리면 '모든 법은 한데 모으고 모든 묘(妙)는 떠나야 비로소 자신의 묘가 나온다'고 다시 말해
전통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구축해야 '노서(奴書)에 그치지 않고
자성일가(自成一家)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초는 날카로운 세태풍자를 서슴지 않는 독설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요즈음의 우리 사회풍조에 대해 물었더니
'사람들이 전부 노력은 하지 않고 결과만 집어먹겠다는 자세를 버리지 않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미 수출되어 나간 상품이 왜 클레임에 걸려 반납됩니까? 다 노력없이 남의 돈 먹겠다는 배짱때문 아니에요? 그뿐이 아니에요. 이 사회엔 도대체 교육이 없어요. 중학생이 강도질하고 경찰이 총질하고 소신없는 정치가들이 허수아비처럼 흔들리는 것도 다 교육부재가 그 원인입니다. 게다가 언어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기를 하나...... 죄들을 많이 지어서 그런지 예수교는 왜 또 그렇게 만연되어 있습니까?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교회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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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는 전인교육에 필수적
여초는 역시 서예에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진 부인과의 사이에 3녀 2남을 두고 있는데 위로 두 딸은 지금 대만대학에 유학중이고 나머지 셋는 국내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자녀분들 중 혹 부친의 뒤를 이어 서예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없다'는 대답.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는 서예인'의 자세를 견지하겠다는 여초가 지금 확실하게 구상하고 있는 것은 86년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동남아 여러나라의 서예인들과 함께 개최하게 될 대대적인 국제전 중화민국.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지아등의 대표적인 서예단체들과 동방연서회가 모두 자매결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전시회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서예 뿐 아니라 묵화와 전각(篆刻)에도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받는 여초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전인교육을 위해선 서예를 가르쳐야 한다'고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세(勢)'로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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