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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월인석보(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雅嵐 2021. 12. 21. 07:16

달이 온 세상 千개의 江에 

하나로 새긴 듯 똑같이 비추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그러하리라.

 

서예하는 사람들이

국어와 함께 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고구려몽석' 김종순 작가는

월인천강지곡의 주요 단어를 뽑아 새기고 해설을 변관에 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다.

http://mbiz.heraldcorp.com/view.php?ud=20131111000440 

 

은둔의 전각예술가…돌에 우주를 새기다

그는 은둔의 전각예술가다. 서울 남산자락 아래 좁은 작업실에서 마치 면벽수도하듯 온갖 돌들을 부여잡고, 새기고 또 새긴다. 국내 미술계에선 아직 이름조차 생소한 작가지만 남들이 알아주

mbiz.heraldcorp.com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월인천강지곡 권상 月印千江之曲 卷上

 

시대 조선

저작자 세종

문화재 지정 국보 제320

창작/발표시기 1447~1448(추정)

성격 시가집, 악장, 찬불가, 한글

유형 문헌

권수/책수 3(현존본은 상권 1)

분야 언어/언어·문자

소장/전승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요약 조선전기 제4대 왕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모아 한글로 편찬한 시가집. 악장·찬불가·한글.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함께 합편되어 월인석보(月印釋譜)로 간행되었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首陽大君)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여 읊은 것이라 한다.

 

원간본과 대조해보면, 이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 사용, 협주(夾註)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었다. 또한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었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하여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 크기대로 영인하여 간행하였고, 그 밖에 1962국어학1호 등에도 영인본으로 수록되었다.

 

1985년 대제각에서 국어국문학 총림 11’월인석보와 함께 영인하였으며, 2002년에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함부르크 대학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안정희 교수팀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 소학사에서 출간되기도 하였다.

 

서지적 사항

활자본. ··3권으로 되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상권 1책과 중권 낙장이 1963년에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에 국보 제320호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내용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하여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화려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하여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하여 그 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하였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석가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1의 첫머리에, “부톄 百億世界化身敎化샤미 리 즈믄 매 비취요미 니라.(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하여 교화하심이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한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곧 이 작품은 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하여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다음가는 최고(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국어학적 특징

월인천강지곡은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표기한 최초의 문헌이다. 이 한글 위주의 체재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월인천강지곡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와 함께 월인천강지곡’, ‘’, ‘’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사이시옷의 표기는 모두 으로 통일되어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 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 을 사용하였다.(: )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 ’, ‘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하여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활자본으로서, 중세국어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높은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구조 및 표현상에 있에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하여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되었다.

 

참고문헌

월인천강지곡의 텍스트 분석(고영근, 집문당, 2003)

논주 월인천강지곡(박병채, 정음사, 1974)

주해 월인천강지곡(허웅·이강노, 신구문화사, 1962)

월인천강지곡의 몇 가지 문제(사재동,어문연구11, 어문연구회, 1982)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고찰(안병희,규장각3, 서울대학교도서관, 1979)

월인천강지곡(이동림,한국의 사상 대전집7 세종, 동화출판공사, 1972)

월인천강지곡 해제(허웅,한국의 명저, 현암사, 1969)

월인천강지곡 해제(남광우,국어학1, 국어학회, 1962)

월인천강지곡고(김사엽,이조시대의 가요연구, 대양출판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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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보상절釋譜詳節

시대 조선

저작자 수양대군(세조)

문화재 지정 보물 제523

창작/발표시기 1447(세종 29)

성격 불교경전, 언해본, 갑인자

유형 문헌

권수/책수 2424(전체추정), 77(현존본)

분야 언어/언어·문자

소장/전승 국립도서관, 동국대도서관, 호암미술관

요약 조선전기 수양대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아 편찬한 불교경전. 언해본·갑인자.

 

개설

세종의 명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한글로 번역하여 편찬한 최초의 책이다. ‘석보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은 종요로운 내용은 자세히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쓴다는 뜻이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서문의 정통십이년칠월이오일 수양군휘서(正統十二年七月二五日 首陽君諱序)”의 기록에 따라 1447(세종 29)으로 추정된다.

 

편찬/발간 경위

편찬의 동기와 목적, 편자 등에 대해서는 월인석보(月印釋譜)1 앞에 실려 있는 석보상절서어제월인석보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1446(세종 28)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돌아가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석보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수양대군이 신미(信眉), 김수온(金守溫)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남제(南齊)의 승우(僧祐)가 편찬한 석가보(釋迦譜)와 당()의 도선(道詵)이 편찬한 석가씨보(釋迦氏譜)를 참조하여 새롭게 편찬하고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한다.

 

서지적 사항

전편(全篇)은 모두 24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전하는 원간본으로는 국립도서관 소장의 권6, 9, 13, 19, 동국대 도서관 소장의 권23, 24, 호암미술관 소장의 권20, 21이 있다. 특히 국립도서관 소장의 4책은 본문과 난상(欄上)에 묵서로 교정까지 되어 있어서, 이 책 간년의 추정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구리로 주조된 한자 활자[갑인자(甲寅字)]와 한글 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이다.

 

인쇄에 사용된 한글 활자는 한글 창제 이후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의 고딕체와 모양이 유사하다. 한글의 자형(字形)은 자음자의 획이 직선으로 되고, 방점과 아래아()가 둥근 점()으로 되어 한글 창제 당시의 모습을 보인다. 다만 훈민정음해례본에서 점으로 되어 있던 , , , 의 가로획과 , , , 의 세로획은 직선으로 바뀌었다. 용비어천가의 한글 가사가 보여주는 한글 자형과 같다고 하겠다.

 

이 한글 활자는 석보상절을 간행하기 위하여 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월인천강지곡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에도 이 한글 활자가 사용되었다.

 

석보상절16세기 이후 부분적으로 중간되었다. 3(천병식 소장)과 권11(호암미술관 소장)이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원간본을 복각(覆刻)한 것이어서, 일부 오·탈각을 제외하고는 원간본과 같은 내용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권11은 국립도서관, 동국대 소장의 원간본과 함께 현재 보물 523-3호로 지정되어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영인 사항

국립도서관 소장의 원간본 권6, 9, 13, 19<한글> 111~125(1955~1959)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1961년 한글학회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한 대제각 재영인본이 널리 유포되어 이용되었으나, 이들 영인본에서는 원전의 교정이 삭제되어 있다. 1991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원전의 복사본을 다시 영인한 바 있다.

 

동국대 소장의 권23, 241969년 문교원에서 원척(原尺)으로 영인된 이후, 이를 저본으로 한 김영배(1972)와 대제각 재영인본이 널리 이용되어 왔다.

 

복각본 권111959년 대구 어문학회에서 영인되고, 1991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에서 재영인되었다. 복각본 권31985년 아세아 문화사에서 영인되었다.

 

내용

책의 내용은 석가족의 연출(緣出)로부터 석가모니의 전세 이야기, 그리고 현세에서의 석가모니의 탄생, 성장, 출가, 성불, 멸도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사후의 경률(經律)의 결집(結集), 불법(佛法)의 유포 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아미타경(阿彌陀經), 약사경(藥師經), 법화경(法華經), 지장경(地藏經)등 석가모니가 설법한 주요 불경 내용이 석가의 일대기 속에 함께 실려 있어 기존에 중국에서 편찬되었던 석가보등과 편찬 방식에서 차이를 보여 준다.

 

편찬 순서는 팔상도(八相圖도솔래의(兜率來儀부처님이 도솔천에서 내려옴비람강생(毘藍降生룸비니 동산에서 이 세상에 태어남사문유관(四門遊觀사대문으로 나가 봄유성출가(踰城出家성을 넘어 출가함설산수도(雪山修道설산에서 도를 닦음수하항마(樹下降魔나무 아래에서 마군에게 항복을 받음녹원전법(鹿苑轉法녹야원에서 설법함쌍림열반(雙林涅槃쌍림에서 열반에 듦)의 순서를 따랐다.

 

의의와 평가

석보상절은 한글로 표기된 최초의 산문 자료이다. 특히 15세기의 다른 언해서들과는 달리 한문 원문이 없고 또한 문체도 자연스러운 점에서 당시의 언어 사실을 더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표기법에 있어서도 같은 세종대의 문헌인 용비어천가월인천강지곡과는 달리 8종성법 등 음소적 표기법만을 보여 준다. 비록 동명사형 표기에서 ㄹㆆ+단일초성+각자병서의 두 가지 방식의 혼용(디 사, 디닐 싸), 의 표기 위치(닷가, ; 부텻긔, 부텨), 의 표기 위치(, ) 등 부분적인 표기법의 혼란은 있으나, 이는 정음창제 초기에 아직 확정되지 않은 몇 가지 표기법에 한정되는 문제이다. 또한 이 표기법의 혼란은 전체 24권이라는 분량의 방대함에서도 그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표기법은 그 이후의 한글 표기법의 전범(典範)이 된다. 한자음 부기(附記)의 방식도 그러하다. 15세기 한글 문헌들은 각 한자별로 그 아래에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부기하는데 그러한 방식의 최초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부기된 한자음 가운데에는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한자음과 일치하지 않는 것도 소수 존재한다. “·, , :, :, :, ···”(참고동국정운음, :, , :/:, ·, ·,···). 이는 두 문헌의 편찬시기의 선후와 관련된 문제로 보인다.

 

한자어의 표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더 많은 한글 표기를 보여 주는데(위두, 미혹, , -, 뎐디-···) 이는 이 문헌의 편찬자가 상정하고 있던 독자층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석보상절이 학문적으로 갖는 가치는 첫째, 불교학적인 면에서 당시의 불교를 조직화한 것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학 수준을 말하는 것이며, 최초의 번역 불경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둘째, 문학적인 면에서 국문으로 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지만, 문장이 유창하고 세련되어 후대의 고전소설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셋째, 국어학적으로는 그 풍부한 어휘와 이에 따른 어법·음운·표기법 등 15세기 중엽의 국어 연구 및 한자음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서지학적으로는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최초의 국문 활자본이란 점에서 값진 문화재로서 가치가 인정된다.

 

참고문헌

석보상절의 서지와 언어(이호권, 태학사, 2001)

석보상절 제이삼·이사 주해(김영배, 일조각, 1972)

주해 석보상절(리동림, 동국대학교출판부, 1959)

조선초기의 역경-최초의 역경석보상절을 중심으로(김영배, 대각사상5, 대각사상연구원, 2002)

새로 발견된 석보상절 권삼 해제(천병식, 국어교육38, 1981)

석보상절의 교정에 대하여(안병희, 국어학2, 1974)

석보상절 제이삼·이사 해제(이병주, 동악어문논집5, 1967)

규장각 한국학연구원(www.kyujanggak.snu.ac.kr)

디지털한글박물관(www.hangeul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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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月印釋譜

 

시대 조선

저작자 세종, 세조

창작/발표시기 1459(세조 5)

성격 불교서

유형 문헌

권수/책수 108, 44, 22, 21, 12, 11

간행/발행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972), 희방사(1568), 동국대학교출판부(1981), 비로사(1572),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1957), 홍문각(1982),

분야 언어/언어·문자

소장/전승 서강대학교 도서관, 동국대학교 도서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김민영(개인소장), 호암미술관, 연세대학교, 수타사, 보림사, 삼성출판박물관

요약 조선전기 제7대 왕 세조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이 지은석보상절을 합편하여 1459년에 간행한 불교서.

 

개설

목판본. 초간본 10(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

합편을 함에 있어서 조권(調卷)도 다르고 내용에도 많은 첨삭을 가하는 등 상당한 변개를 행하였다. 먼저 조권을 보면 석보상절11과 권19의 내용이 각각 월인석보21과 권18에 나타나는가 하면, 같은 권13석보상절법화경1, 월인석보법화경2,3의 내용을 담고 있는 등, 11부터 권차(卷次)가 달라져 있다. 문장과 표기법을 보면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 표기의 위치, 한자음 종성 과 협주(夾註)의 추가, 어구의 수정 등 부분적인 손질이 있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인 수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월인석보는 전혀 새로운 문헌이 되었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무상(無常)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석보상절로 미루어서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이 되지 못한다. 전하는 간본의 종류와 소장자, 영인사항은 다음과 같다.

 

(1) 2 : 21. 초간본이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2년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으로는 1568(선조 1) 희방사(喜方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책판(冊版)6·25 이전까지 보존되었다. 이 간본의 권11960년 국어학회(國語學會) 고전총서로 영인되었다.

 

(2) 8 : 22. 초간본(낙장 있음)이 동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1년 동국대학교출판부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1572년 비로사(毘盧寺 : 경상북도 풍기)의 것이 전하는데, 1957년 청사진본(靑寫眞本)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東方學硏究所)에서 축소 영인하였고, 71978년 동국대학교 동악어문학회(東岳語文學會)에서 영인하였다. 한편, 16세기 중엽의 복각(覆刻)으로 보이는 권8의 중간본이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六堂文庫)에 있다.

 

(3) 10 : 22. 초간본(낙장있음)이 양주동가(梁柱東家)의 구장(舊藏)으로 전하는데, 1957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하였다. 서울의 김민영이 소장하고 있다.

 

(4) 11·12 : 22.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5) 13·14 : 22. 초간본(낙장 있음)이 있으며, 1982년 홍문각(弘文閣)에서 영인하였다.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6) 17·18 : 21. 초간본(낙장 있음)이 수타사(壽陀寺 : 강원도 홍천)에 소장되어 있는데, 1957년에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초간본으로 보림사(寶林寺 : 전라남도 장흥)에 권17만 소장되어 있는데, 수타사본의 낙장부분만 1972한글150호에 영인되었다.

 

(7) 21 : 12. 중간본만 전하며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542(중종 37) 광흥사(光興寺 : 경상북도 안동), 1562(명종 17) 무량굴(無量崛 : 전라북도 순창), 1569(선조 2) 쌍계사(雙溪寺 : 충청남도 은진)에서 복각하였다. 21의 광흥사판을 1983년 홍문각에서 영인하였다.

 

(8) 22 : 11.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16세기 중엽 한 사찰에서 복각하였다.

 

(9) 23 : 11. 서울의 김종규소장으로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책은 월인천강지곡()497524까지 28수가 실려 있고 여기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의 내용을 해설처럼 싣고 있는데 석보상절23의 내용과는 다르다. 1559년 무량굴에서 복각한 것이다. 1963동방학지(東方學志)6집에 영인되었다. 李東林

 

(9) 25 : 11. 전라남도 장흥 보림사에 소장되어 있다. 월인석보의 전체 권수가 몇 권으로 구성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는데, 보림사 사천왕상 복장에서 새로 제25권이 발견되어 월인석보가 전체 25권으로 편찬된 것임이 밝혀졌다. 권 머리 부분에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탈락되어 있다.

 

월인천강지곡에 해당되는 석보상절은 권24의 내용인데, 석보상절의 내용을 석가보5경덕전등록등에서 수정 보완하여 싣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주석 부분에는 사분률(四分律현우경(賢愚經분별공덕론(分別功德論다론(多論계단경(戒壇經대품(大品지론(智論갈마소(鞨磨疏십송률(十誦律) 등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월인천강지곡은 권 머리 부분과 마지막에 탈락되었기 때문에 몇 수가 실렸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재 기 577부터 583까지 7수가 실려 있다. 이 책의 권말에는 월인천강지곡582583을 싣고 여기에 대한 주석(註釋)이 한 장 분량만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탈락되었다.

 

제일 끝에 실린 월인천강지곡583은 내용상 결론 부분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고, 이 부분의 설명이 석가보5의 내용 가운데 아육왕조팔만사천탑기(阿育王造八萬四千塔記)까지만 실려 있고 석가획팔만사천탑숙연기(釋迦獲八萬四千塔宿緣記석가법멸진연기(釋迦法滅塵緣記석가법멸진상기(釋迦法滅塵相記)의 내용이 빠져 있다.

 

그러므로 전체 내용 구성상 뒷부분에 월인천강지곡 45곡을 포함하여 상당량의 내용이 탈락된 것(30여 장)으로 추정된다. 朴相國월인석보는 한글 창제 직후에 간행된 산문 자료로서 국어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1 앞에 훈민정음언해본(諺解本)이 실려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세종과 세조의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으로, 현존본에 나타난 판각기법이나 인출(印出) 솜씨 등을 보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당시에 편찬, 간행되었던 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을 세조 때 다시 편집하였기 때문에, 초기의 한글 변천을 살피는 데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 초기에 유통된 중요경전이 취합된 것이므로 당시 불교 경전의 수용태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이십이(第二十二)에 대하여(김영배, 한국문학연구8, 1985)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칠(第七() 해제(解題)(천혜봉, 영인 월인석보7·8, 동국대학교출판부, 1981)

중세어(中世語)의 한글자료(資料)에 대한 종합적(綜合的) 고찰(考察)(안병희, 규장각3, 서울대학교도서관, 1979)

월인석보목판고(박상국, 문화재11, 1977)

월인석보(月印釋譜) 제일(第一() 해제(解題)(정연찬, 영인 월인석보1·2, 서강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1972)

월인석보해제(月印釋譜解題)(민영규, 한국의 명저, 현암사, 1969)

월인석보(月印釋譜)와 관계불경(關係佛經)의 고찰(考察)(이동림, 백성욱박사송수기념불교학논문집, 195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학 관련 최고의 지식 창고로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과 업적을 학술적으로,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한국학 지식 백과사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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