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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맞이의 정체 - 한국고전번역원

雅嵐 2020. 1. 1. 10:43

한국고전번역원 고전산책 - 고전산문 - 사백여덟 번째 이야기 2016년 1월 4일

 

새해 해맞이의 정체

 

[번역문]
  화비령(火飛嶺) 남쪽에 정동(正東)이라는 곳이 있다. 동해 바닷가의 작은 산이다. 산은 모두 바위이고, 산의 나무는 모두 소나무이다. 춘분(春分)에 동쪽을 바라보면 해가 정중앙에서 뜬다. 옛날에 동해 신령의 사당이 있었으나 오래전에 양양(襄陽)으로 옮겼다.
  산이 기이하고 험준하며 신령이 있는데, 나무 한 그루라도 베면 온 마을에 재앙이 생긴다. 마을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며 전염병이 돌면 기도를 드린다.

[원문]
火飛南, 有地名正東者, 蓋東海上小山. 山皆石, 山木皆松, 春分東望, 日出正中. 古有東海神祠, 中古移祠於襄陽. 山奇峭有神, 伐一樹則一村有災, 鄕人神事之, 凡疾疫有禱焉.
 
- 허목(許穆, 1595~1682), 『기언(記言)』 권24, 「삼척에 있을 때 지은 기행문에서 뽑은 글[陟州時記行鈔語]」

 

해설

 
  
  
새해 해맞이의 명소로 손꼽히는 정동진(正東津)에 대한 기록이다. 옛 문헌에는 주로 정동촌(正東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동촌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09년(고려 충선왕1)에 건립된 매향비(埋香碑)이다. 현재 탁본만 남아 있는 이 매향비에는 “강릉 정동촌 물가에 향나무 310그루를 묻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정동촌’이라는 이름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여기에 나루가 생기면서 ‘정동진’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정동진이라는 지명은 임금이 계신 한양의 정동 쪽에 있으므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동촌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설명은 맞지 않는다. 고려의 수도는 한양이 아니라 개성이었기 때문이다. ‘정동’은 이 글에 언급한대로 해가 정동 쪽에서 뜬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과거 정동진에는 동해 용왕의 사당이 있었다. 이곳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전(祀典)의 대상으로 지정된 곳이다. 그러나 허균(許筠)의 「중수동해용왕묘비(重修東海龍王廟碑)」에 따르면, 정동진에 있던 동해 용왕의 사당은 1536년(중종31) 양양으로 옮겨졌다.

  국가에서 제향을 올리던 중요한 사당이 이웃 고을로 옮겨간 뒤, 이 외딴 바닷가 마을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정동진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은 1660년 삼척 부사로 부임한 허목이 남긴 윗글, 그리고 1780년 역시 삼척 부사로 부임한 이헌경(李獻慶)이 우연히 정동진에 왔다가 폭설에 발이 묶여 20일 가까이 머무르며 남긴 몇 편의 시가 전부이다.

  이처럼 초라했던 정동진이 관광 명소로 각광받게 된 것은 전적으로 드라마의 힘이다. 1995년 방영된 ‘모래시계’의 인기에 힘입어 정동진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 관광지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정동진은 파도가 거세고 구름이 자욱하다. 해라고는 볼 수 없는 흐린 날씨이다. 그런데도 드라마 방영 이후 정동진은 은근슬쩍 해돋이의 명소로 자리잡았다. 매년 1월 1일이면 정동진은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비는 이른바 ‘해맞이’를 위해 멀리서 찾아온 사람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 유행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정동진이 관광지로 자리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처럼, 새해 해맞이라는 유행도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물론 바다의 해돋이는 먼 옛날부터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이를테면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의 해돋이는 금강산 유람객의 필수 관광 코스였다. 하지만 꼭 새해 첫날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며 소원을 비는 풍속은 우리나라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문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전통은 일제강점기의 산물일 가능성을 의심해야 한다. 기실 일본에서 새해 해맞이는 오래된 풍속이라고 한다. 메이지(明治) 연간에 신도(神道)가 국가 종교로 자리잡으면서 성행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일본의 새해 해맞이 풍속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일제강점기의 1월 1일자 신문을 보면 으레 일왕 내외의 사진과 함께 떠오르는 해의 그림이 실려 있다. 이 해가 일본을 상징한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해의 상징은 더욱 자주 등장한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1944년 1월 1일의 신문 기사이다. 이날 『매일신보(每日新報)』에는 「칙제(勅題): 해상일출(海上日出)」이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칙제’는 일왕이 발표하는 와카(短歌)의 제목이다. 메이지 시대 일본 왕실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면 왕실 구성원과 고관대작이 모인 자리에서 와카를 낭송하였다. 가어회시(歌御會始)라고 한다. 이날 신문에는 바다에서 해가 뜨는 큼지막한 사진과 함께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 『매일신보』 1944년 1월 1일, 일본 군인이 새해 첫 해를 향해 경례하고 있다. 상관도 아닌 해를 향해 경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엄하옵신 측에서는 거국성전완수의 결의도 새로웁게 마지하는 신년 소화(昭和) 19년의 옴을 축하하옵시는 궁중가어회시(宮中歌御會始)의 어제(御題)를 ‘해상일출(海上日出)’로 어치정하옵시었는데 결전의 해에서 승리의 해로 축복할 새해를 마지하는 때 휘황찬란하게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융성하여 가는 우리나라를 바라봄과 가치 근안되여 황공하옵기 이를 곳 업다…… (『매일신보』 1944년 1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1월 1일 가어회시에서 낭송한 와카의 제목이 ‘해상일출’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는 융성하여 가는 우리나라(일본)’라는 언급에서 그들의 의도는 명백히 드러난다. ‘해상일출’은 일제의 상징 ‘욱일승천(旭日昇天)’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 『매일신보』 1943년 1월 1일, 상단의 그림에 일출을 배경으로 일본 군함과 전투기가 보인다. 하단의 사진은 농촌 사람들이 해를 향해 절하는 모습이다. 우리식 큰절이 아니라 일본식 케이레이(敬禮)다. 과연 새해 첫 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진 출처 : 한국언론진흥재단
 
새해 해맞이뿐만이 아니다. 석굴암을 비추는 토함산 해돋이를 묘사한 글이 교과서에 실리면서 해돋이의 장관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저 볼거리에 불과한 해돋이를 신비로운 종교적 체험인양 묘사한 글을 읽으면,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누구도 해 뜨는 광경을 보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하지 않는다. 새해 해맞이의 정치적 함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외딴 바닷가 마을이 관광 명소로 자리잡는 것도 나쁘지 않고, 해돋이를 보며 새해의 결의를 다지는 것도 잘못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내포된 역사와 의미를 간과하면 곤란하다.

글쓴이 : 장유승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 주요저역서
    - 『일일공부』, 민음사, 2014
    -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 16~18세기 한중일 서적의 전파와 수용』, 소명출판, 2014(공저)
    -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단독)
    - 『정조어찰첩』, 성균관대 출판부, 2009(공역)
    - 『소문사설 - 조선의 실용지식 연구노트』, 휴머니스트, 2011(공역)
    - 『승정원일기』(공역), 『월정집』(공역) 등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