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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진보 해제 -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종합DB

雅嵐 2020. 1. 21. 11:44

古文眞寶前集고문진보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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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宋載卲(成均館大學校 漢文學科 敎授)



1. 書誌的 考察


(1) 中國版
《고문진보》가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해서 처음 편집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至正丙午孟夏 旴江後學 鄭本士文序”로 끝맺고 있는 〈古文眞寶序〉라는 글이다. 이 글에 의하면, 三山의 林以正이란 분이 거리에서 이 책을 구하여 보고 “좋지 못한 것은 바로잡고 번거로운 것은 끊어내고 간략한 것은 자상히 하여 재편집했다.”고 한다. 이는 임이정의 死後에 그 제자인 余 아무개가 鄭本에게 서문을 청하여 간행한 것이다. 鄭本이 이 서문을 쓴 해가 至正 丙午년이니 곧 元나라 順帝 26년, 1366년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고문진보》는 그 이전 원나라 때의 어느 시기에 만들어진 듯하다. 이를 坊本이라 한다. 임이정과 정본에 대해서는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또 黃堅이 편찬했다는 《古文眞寶》가 있는데 이 또한 언제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책의 중간본인 〈重刊 古文眞寶跋〉에 “弘治 15년 孟冬 上澣日에 靑藜齋는 雲中 有斐堂에서 쓰다[弘治十五年 孟冬上澣日靑藜齋雲中有斐堂書]”라 씌어 있는 것에서 1502년에 중간된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편자인 황견과 중간본을 간행하고 발문을 쓴 청려재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2) 朝鮮版
우리나라에서 《고문진보》가 간행된 전후 사정은 金宗直의 〈詳說 古文眞寶大全跋〉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글에서 김종직은, 先秦ㆍ兩漢 이후에 聲律과 對偶에 치중하여 문장이 병들었기 때문에 梁나라 蕭統 이래 文選集이 많았으나 모두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고,오직 《眞寶》 한 책은 그렇지 않아서 그 채집한 것이 眞西山 正宗의 遺法을 얻었다. 왕왕 近體의 글이 섞여 있으나 몇 편에 지나지 않아서 그 세운 뜻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다. 전후 세 번 사람의 손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埜隱 田先生이 처음으로 合浦에서 간행했고 그 후 管城에서 이어 간행했다. 《埜隱逸稿 卷4라 적고 있는데 이 기록에 의하여 우리는 《고문진보》가 고려 말 田祿生(1318-1375)에 의하여 처음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姜淮仲이 쓴 〈善本大字諸儒箋解古文眞寶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김종직의 기록을 살펴보자.


景泰 초에 翰林侍讀 倪先生이 지금 책을 우리나라에 가져다 주었는데 詩와 文이 옛날 책에 비하여 여러 갑절이나 되었으니 이를 《大全》이라 부른 것이다. 漢ㆍ晉ㆍ唐ㆍ宋의 奇閑하고 儁越한 작품들이 여기에 모였다. 네 글자 여섯 글자로 對句를 맞추고 聲律을 늘어놓은 작품은 비록 비단과 같이 수놓아 아로새기고 북소리처럼 豪壯하더라도 수록하지 않았다. 또 濂溪ㆍ關ㆍ洛의 性命之說을 첨가하여 후대에 문장을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뿌리가 있음을 알게 했으니 아, 이것이 참다운 보배[眞寶]가 된 소이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조선 全 시기에 걸쳐 거의 唯一本처럼 읽혀졌던 《詳說 古文眞寶大全》은 景泰 초에 중국 사신 倪謙이 明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란 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옛날 책에 비하여 여러 갑절이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林以正이 편찬한 책이나 黃堅이 편찬한 책보다 더 많은 양을 수록하고 있었다. “여러 갑절이나 된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말로 정확하지 않지만 그 전 책보다 훨씬 풍부해진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리고 이 책은 田祿生이 合浦에서 간행한 책과도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눈길을 끄는 것은, “濂溪ㆍ關ㆍ洛의 性命之說을 첨가했다.”는 사실이다. 즉 周敦頤ㆍ張載ㆍ程顥ㆍ程頤의 性理說을 새로 첨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설 고문진보대전》의 편자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상설 고문진보대전》의 후집 권10에는 舊本에 없는 周濂溪의 〈太極圖說〉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끝에 다음과 같은 후기가 붙어 있다.


……이제 고문을 뽑으면서 〈太極圖說〉과 〈西銘〉 두 편으로써 끝을 마침이 어찌 뜻이 없겠는가? 대개 문장과 도리는 실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배우고자 하는 자가 韓愈ㆍ柳宗元ㆍ歐陽修ㆍ蘇軾의 詞章의 글로 말미암아 더 나아가서 周敦頤ㆍ程顥ㆍ程頤ㆍ張載ㆍ朱熹의 理學의 글로써 이를 순수하게 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도리로써 그 淵源을 깊게 하고 詞章으로써 그 氣骨을 건장하게 한다면 이에 문장에 병폐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차례로 엮은 깊은 뜻이다. …… 新安 陳櫟은 삼가 쓰다.


이 後記로 보아 《상설 고문진보대전》은 陳櫟이 편찬한 것이 확실하다. 이는 舊本에다 “濂溪ㆍ關ㆍ洛의 性命之說을 첨가했다.”는 김종직의 발문과도 일치한다. 陳櫟은 宋末 元初의 학자로 자는 壽翁, 호는 定宇이며 만년에는 ‘東皐老人’으로 불려졌다. 그는 宋나라가 망하자 은거생활을 했으며 朱子의 학설을 신봉한 점으로 보아 그가 편찬한 《상설 고문진보대전》에 性理書를 첨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김종직의 발문에 따르면 倪謙이 가져 온 이 《상설 고문진보대전》은 金屬活字로 간행된 듯하다. 이것은 “鑄造한 글자가 인쇄하자마자 무너져서” 세상에 널리 반포되지 못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李恕長과 吳伯昌의 주선으로 당시 牧使 柳良과 判官 崔榮이 木板으로 이를 간행했는데 김종직이 1472년(성종3) 이 목판본의 발문을 쓴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상설 고문진보대전》의 초간본이 아닌가 한다.



2. 編次와 內容


이 책은 前集과 後集으로 나뉘어 있다. 전집에는 詩를, 후집에는 文을 수록하고 있는데, 시는 近體詩가 아닌 古詩 위주로 선별했고, 문은 六朝時代에 유행했던 騈文이 아닌 이른바 古文 위주로 선별하여 수록했다. 이러한 편찬의도는 黃堅本에 붙인 靑藜齋의 발문에 잘 드러나 있다.


아! 三代 이전의 글은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도다. 이 책에 실린 글들도 古文의 예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옛날과 떨어진 것이 멀지 않아서 古人의 법식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문장이 변해서 드디어 고인을 천 길 높은 곳에 세워 두고는 고인을 따라갈 수 없는 것처럼 여기지만 과연 古人과 今人이 같을 수 없단 말인가. 古文을 회복하는 데에 뜻을 둔 사람은 어찌 이 책에서 그것을 구하지 않는가.


이 책의 글을 읽고 배움으로써 先秦ㆍ兩漢의 건강하고 질박한 文體를 恢復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고문의 문체만 회복하자는 것이 이 책의 의도는 아니다. 鄭本의 서문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고문진보》를 엮음에 있어서 첫머리에 學問을 권장하는 글이 있고, 끝에 〈出師表〉와 〈陳情表〉가 있으니 어찌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게 하고 忠孝로써 이끌게 함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이 책을 엮은 사람의 깊은 뜻이다.


부지런히 학문에 힘써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하여 《고문진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상설 고문진보대전》도 이전의 책들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글들을 싣고 있지만 그 근본 취지는 坊本이나 황견본과 대동소이하다.
《상설 고문진보대전》에는 전집에 詩 243首, 후집에 文 130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130편의 문에는 韓愈의 글이 30편, 蘇軾의 글이 16편, 柳宗元의 글이 10편, 歐陽修의 글이 9편, 蘇洵의 글이 8편 실려 있어서 역시 唐ㆍ宋 古文家의 문장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번역본의 대본이 된 전집의 체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전집의 시는 詩體별로 분류해 놓고 있다.


1권 : 勸學文ㆍ五言古風短篇
2권 : 五言古風短篇
3권 : 五言古風長篇
4권 : 七言古風短篇
5권 : 七言古風短篇
6권 : 七言古風長篇
7권 : 長短句
8권 : 歌類
9권 : 歌類
10권 : 行類
11권 : 行類
12권 : 吟類ㆍ引類ㆍ曲類ㆍ辭類


이상과 같은 체제로 前集에는 65명의 시 243수를 수록하고 있다. 作家別로는 李白이 44首로 가장 많고 그 다음 杜甫가 42수, 蘇軾이 18수, 韓愈가 14수, 白居易가 8수의 순이다. 詩 역시 唐ㆍ宋의 작품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陶淵明의 시가 16수 수록되어 있으며 樂府, 古詩 등 無名氏의 시도 7수 수록되어 있다. 제1권에 실린 8수의 勸學文은 半文半詩의 성격을 띠는 글인데 이 책의 첫머리에 수록함으로써 배우는 자의 자세를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前集에 수록된 시는 거의 대부분이 古體詩이다. 近體詩라고 할 만한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古風의 범주에 들 만한 작품들이다. 周知하는 바와 같이 근체시는 南朝의 沈約에서 비롯되어 唐初의 沈佺期ㆍ宋之問에 이르러 정형화된 詩體로, 字數와 句數, 平仄과 對句에서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는 형식이다. 급기야는 지나친 형식에 얽매여 思想과 情緖의 자유로운 표현을 구속하는 병폐를 낳기도 했다. 이것은 散文에서의 騈文의 폐단과 흡사한 현상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후집에서 변문이 아닌 고문을 선별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시에서도 近體詩가 아닌 古體詩를 뽑아 수록한 것이다.
대부분의 시에는 詩題 다음에 일종의 小序에 해당하는 해제가 붙어 있고, 인명ㆍ지명이나 어려운 구절에는 자세한 註가 달려 있어서 시의 이해를 돕고 있다. 체제상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作者의 표기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王維ㆍ崔顥의 경우와 같이 이름을 표기한 곳도 있고, 韓退之ㆍ歐陽永叔의 경우와 같이 字로 표기된 곳도 있으며 朱晦庵의 경우와 같이 號로 표기된 곳도 있다. 동일 인물의 표기도 蘇東坡ㆍ蘇子瞻ㆍ東坡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 이것은 白居易ㆍ白樂天, 李白ㆍ李太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3. 古文과 古文運動


이 책에 수록된 詩와 文은 古文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옛사람들의 글을 모두 고문이라 할 수 있지만, 중국문학사의 맥락에서 보면 고문은 騈文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고문진보》에 수록된 글들도 이렇게 변문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고문을 기준으로 하여 선별되었기 때문에 고문의 성격과 고문 부흥운동의 전말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漢나라 이전의 질박하고 자유로운 문장이 魏를 거쳐 六朝時代에 이르면 차츰 騈文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주로 散文 創作에 사용된 이 騈儷體는 聲律과 對偶를 중시하는 형식위주의 문체이다. 따라서 화려한 수식과 기교가 동원되고 문장구조도 고문의 單句로부터 複文으로 변해 갔다.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이 시기에는 四聲에 기초한 聲律을 중시하여 沈約, 謝眺 등이 주도한 이른바 ‘永明體'라 일컬어지는 新體詩가 등장하는데 종래의 古詩보다 매우 엄격한 형식을 요구하는 시이다.
六朝時代에 이와 같이 형식을 위주로 하는 문체가 성행한 것은 그 시대의 사회상과 관련이 있다. 육조시대에는 빈번한 王朝 交替와 戰亂으로 인하여 극도로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隱逸主義, 享樂主義, 個人主義가 만연했으며 문학도 唯美主義, 藝術至上主義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결과 문학의 예술성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기는 했으나, 지나치게 華美하고 柔弱한 작품을 생산한 것이 당시 문단의 실정이었으며 급기야는 이러한 풍조가 문학의 병폐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先秦 兩漢의 질박하고 건강한 문체를 회복하자는 논의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梁나라 簡文帝가 浮華한 문장의 병폐를 지적한 바 있고 隋나라 文帝는 公私文書에 華艶한 문체를 쓰지 말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후 唐初의 王勃 같은 이도 변려문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러나 왕발의 〈滕王閣序〉 자체가 변려문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사실에서 보듯이 아직도 고문으로의 복귀는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좀더 본격적인 운동은 陳子昻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그는 질박하고 건실한 漢ㆍ魏의 문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晉ㆍ宋 이후의 浮美한 문학을 배척했다. 이후 李華ㆍ元結 등이 ‘宗經明道' 의 기치를 내세우고 騈文과 다른 散體로 글을 써서 古文運動의 선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宗經明道를 표방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문운동은 단순히 문체만 개혁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형식과 기교 위주의 문학으로부터 참다운 내용을 담는 문학으로 복귀하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다. 참다운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형식의 굴레를 벗어 던지는 일이 선행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참다운 내용을 담는 글의 典範을 이들은 先秦 兩漢의 고문에서 찾았다.
일종의 復古主義라 할 수 있는 이 古文運動은 韓愈와 柳宗元에 와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韓愈는 철저히 내용 위주의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내가 고문에 뜻을 두는 것은 그 文辭가 좋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道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答李秀才書〉)라 하여 文보다 道를 우위에 놓았다. 그가 말하는 도는 儒家의 도이다. 그는 堯ㆍ舜으로부터 孔子를 거쳐 이어온 道가 孟子가 죽은 후에 끊어졌다고 보고 자신이 그 끊어진 도를 다시 잇겠다고 했다. 그는 儒學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고문운동을 펼친 것이다. 그는 고문을 학습하는 방법과 요령을 묻는 李翊에게 답한 편지에서 자신의 학습과정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三代와 兩漢의 글이 아니면 감히 보지도 않았고, 성인의 뜻이 아니면 감히 마음에 두지 않았다


이렇게 한유는 ‘文以載道'를 표방하여 文의 載道的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유가의 문학을 확립시켰다. 이어 柳宗元도 한유의 고문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이를 계승, 발전시켰다. 한유와 유종원의 고문운동은 한유의 제자인 李翶, 黃甫湜, 李漢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나, 晩唐 이후 五代를 거쳐 宋初에 이르는 시기에는 騈文이 다시 번성했다. 그러다가 송나라의 歐陽修가 다시 고문운동을 일으켰다. 蘇洵, 蘇軾, 蘇轍 삼부자와 王安石, 曾鞏 등이 이 운동에 가세했고, 소식의 제자인 黃庭堅, 陳師道 등이 한유의 사상을 철저히 계승하여 古文 唱導에 앞장섰다. 《고문진보》에는 이들 당ㆍ송 고문가들의 글이 반 이상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고문진보》의 성격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4. 우리나라 학자들의 《고문진보》 수용


우리나라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四書ㆍ三經 다음으로 《고문진보》를 많이 읽었다. “내가 태어나서 이를 갈 무렵에 고문진보 전집을 읽었으며 겸하여 唐音을 보고 시 짓는 법을 배웠다.”(《滄浪集》)라는 등의 글을 수 없이 볼 수 있는데 이는 어렸을 때부터 《고문진보》를 골똘히 읽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리고 《고문진보》에 실린 시에 次韻한 작품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도 이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를 증명하고 있다. 退溪의 제자인 李德弘은 〈古文前集質疑〉와 〈古文後集質疑〉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 글은 《고문진보》 전집의 시 71수와 후집의 문 67편에 대하여 미심쩍은 부분이나 해석이 엇갈리는 부분, 그리고 어려운 구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인데 양이 방대하여 《고문진보》에 대한 평소 그의 관심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杜甫詩 〈哀江頭〉의 ‘人生有情淚沾臆 江水江花豈終極’에 대하여,‘感時花濺淚 恨別鳥驚心’ (杜甫의 시 〈春望〉의 일절)의 부류와 같은 것이다. 다 인정의 지극한 슬픔에 기인한 것인데, 無心한 사물을 빌어 극단적으로 말한 것이다. 《艮齋集 續集 卷4》라 풀이하고 있다. 金隆의 《勿巖集》에도 《古文眞寶前集講錄》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金時習은 《고문진보》 책을 구하고 나서 〈得古文眞寶〉라는 시를 지어 그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세상에서 옥구슬을 부질없이 다투지만
써 버리면 끝내는 하나도 남지 않아


이 보배를 뱃속에 간직할 수 있다면
가슴 가득 옥소리가 쟁그랑 울리겠지


世間珠璧謾相爭 用盡終無一个贏
此寶若能藏空洞 滿腔渾是玉瑽琤 《梅月堂集 卷9》


이렇게 볼 때 《고문진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의 서적이었다. 이 책을 보고 중국의 名文에 접하게 되고, 이 책을 읽음으로써 문장과 시를 짓는 기초를 다졌던 것이다. 《宣祖實錄》의 다음과 같은 기록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上이 이르기를 ‘소시 때 문장을 익힌 적이 있는가? 그대의 文詞를 보건대 매우 좋으니 배운 적이 있는가?’ 하니 李珥가 아뢰기를 ‘신은 소시 적부터 문사를 배운 적은 없습니다. 소시에는 禪學을 자못 좋아하여 여러 經을 두루 보았으나 착실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 儒學으로 돌아와 우리 유학의 글에서 그 착실한 이치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문장을 위하여 읽은 것이 아니었으며, 지금 문장을 짓는데 대략 文理가 이루어진 것 역시 별도로 공부를 한 일은 없고 다만 일찍이 韓文ㆍ《古文眞寶》와 《詩經》ㆍ《書經》의 大文을 읽었을 뿐입니다.’라 하였다


李珥도 일찍이 《고문진보》를 읽었으며 그것이 문장을 짓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이다. 《朝鮮王朝實錄》에는 임금이 신하들이나 都會所에 《고문진보》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데 이 역시 이 책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柳希春이 쓴 《眉巖日記》의 다음과 같은 대목도 눈길을 끈다.


아침을 먹은 후 비를 무릅쓰고 玉堂에 나아가 箚子를 올렸는데 正字 金應男이 지은 글이 심히 절실하고 곧았다. 應敎 鄭琢과 校理 趙廷機가 다투어 글자의 의심스러운 부분을 물었는데 조정기가 《고문진보》를 질의해서 내가 모두 답했다. 〈弔古戰場文〉의 경우에는 내가 그 틀린 글자를 辨析해 주었고 ‘期門' ‘組綀' ‘殺之何咎' 등의 뜻을 지시해 주었다. 또한 〈歸去來辭〉의 ‘扶老' ‘景翳翳以將入' ‘帝鄕不可期'와 〈赤壁賦〉의 ‘盈虛者如彼' 등의 구절을 내가 모두 거침없이 변석하니 좌중이 悅服했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당시 학자들의 《고문진보》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玉堂의 관리들이 《고문진보》의 의심스러운 구절에 대하여 서로 토론할 정도로 이 책은 널리 읽혀졌고 또 그만큼 중요한 책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모두 《고문진보》를 중시한 것은 아니었다. 退溪는 前集에 실려 있는 〈眞宗皇帝勸學文〉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제자들에게 이 글을 읽지 말라고 말했는데 이는,


집을 부유하게 하려 좋은 밭 살 필요 없으니
책 속에 저절로 千鍾의 곡식 있다네


거처를 편안히 하려 높은 집 지을 필요 없으니
책 속에 저절로 황금의 집이 있다오


富家不用買良田 書中自有千鍾粟
安居不用架高堂 書中自有黃金屋


로 시작되는 권학문의 내용이 부귀와 공명으로 학자들을 유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읽어야지, 어떤 대가를 전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鄭士信도 같은 취지의 글을 남긴 바 있다. 柳希春은 《고문진보》에 玉石이 섞여 있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고 그 예로 白居易의 〈長恨歌〉를 들고 있다. 唐明皇이 며느리를 빼앗은 불륜의 사실을 백거이가 美化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許筠은 《史畧》과 함께 《고문진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曾先之의 《史畧》 1권을 成文戴公(成俔의 諡號)이 얻고는 매우 좋아했다. 그때 蕃仲(成俔의 아들인 成世昌의 字) 상공이 이미 登第했기에 文戴公이 蕃仲으로 하여금 한번 誦讀케 하고는 ‘이만하면 主文하기에 족하다.'라 말했다. 國初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고문진보》 전후집을 읽고서 문장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선비들이 처음 학문을 할 때 반드시 이 책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사략》은 全史를 통독한 자가 요점을 잡아서 본 다음 잊지 않고 기록한 것이며, 《고문진보》는 한 사람이 우연히 뽑은 것이어서 그 버리고 취한 기준을 알 수 없으니 읽지 않더라도 될 것이다. 蒙學의 文理를 밝히는데는 《論語》, 《孟子》, 《通鑑》이 좋은데 하필 얕은 데에 기준을 둘 필요가 있겠는가. 《惺所覆瓿藁 권24》


허균이 《고문진보》를 읽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은, 이 책이 한 사람이 우연히 뽑은 것이어서 그 선별기준이 모호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같은 글에서 “權汝章(權鞸의 字), 李子敏(李安訥의 字)은 모두 고문진보를 읽지 않았는데도 그 詩가 저절로 좋다.”고 하여 《고문진보》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허균이 이 책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그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문학적 성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다. 따라서 여기서 섣불리 논의할 수 없는 일이다.
《고문진보》는 몇몇 사람들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계속 읽혔고 지금도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중국 고대 名文의 眞髓에 접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하여 학문을 성숙시킨 선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고문진보》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