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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김훈 산문 / 연필로 쓰기 - 정진규 시

雅嵐 2019. 5. 17. 16:53

연필로 쓰기, 김훈, 문학동네, 2019.

(여학생 모임 5월 15일 : 도토리묵무침, 묵은지 총각무 찜,

김훈 어머니의 궁중떡볶이 - 고기가 누구 한 사람에게 몰리지 않도록 곱게 아주 오래 다지고 미리 떡과 함께 오래 주물러 간도 배고 모든 재료에 골고루 달라붙게 해주는 것이 포인트)

 

아마 80년대였을 것이다.

정진규의 '연필로 쓰기' 시에 반하여

무수히 베끼어 나누어주기 좋아했고

내 손으로 버린 적 없는 향기로운 연필이 한가득이 되었다.

종이를 펼치고 도루코칼로 육각을 일정하게 돌며 깎아내는 희열과

그 나무냄새 연필심 냄새가 흐믓하다.

다 깎은 연필을 모아 다시 심을 세워 사각사각 갈아낼 때면,

또 그것이 한 두개씩 부러지고 골먹어 모두 깎아내어 버리게 될 때는

또다른 희열이 있다.

적당한 농도로 잘 써지는 연필은 키가 아주 많이 줄어있다.

아주 적당히 물러서 지우개로 완벽하게 지워지는 연필은 또다른 애용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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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 정진규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 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 버릴 수 있는 나의 생에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 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따뜻한 상징, 나남, 1987, 192면 ; '생에' 와 '생애' 두 가지로 쓰인 것이 맞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처음 알게된 시는 같은 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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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문화센터 3층 창문까지 가득한 목련이

맨 꼭대기부터 추락하는 것을 보고 작년에 읽고 또 읽었던 김훈의 '목련'에 대한 글이 생각났었다.

그러면서 목련의 자의식과 그것이 한 잎 한 잎 펄썩 바닥에 주저앉는 것을 철저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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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김훈, 자전거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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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76면

...나이를 먹으니까 나 자신이 풀어져서 세상 속으로 흘러든다. 이 와해를 괴로움이 아니라 평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온전히 늙어간다. 새로운 세상을 겨우 찾아낸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79면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왜 소중한가....재료를 다듬고, 섞고, 불의 온도를 맞추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간도 함께 익어간다.....먹어보지 않은 맛... 상상하는 정신의 힘이 작동.. 요리는 마음의 힘을 키워준다고...(제 손...아내손이 아니다. 아내의 손만 기다리는 가족들의 TV응시를 흘깃 보면... 아내의 인간성은 황폐화된다.)

 

81면

삶이 요구하는 형식을 존중하라. 삶의 내용은 형식에 담긴다... 좋은 형식은 인간을 편안하게 해준다...

 

83면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105면

이순신의 숫자는 그의 정신의 한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바다의 사실에 정확히 입각해 있었다. 전쟁은 신통력이 아니라 사실의 힘으로 치르는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사실과 침묵은 나란히 간다...'아직도' 남아 있는 이 12척은 그가 입각해야 할 '사실'이었고 그의 당면현실이었다. 그는 그 12척 위에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세웠다. 그의 용기는 12척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힘이다.

 

312면

구석기 사람들은 주먹도끼뿐 아니라 찌르기, 갈기, 부수기, 밀기, 빻기, 긁기, 쪼개기, 새기기, 뚫기, 털기, 찍기, 쪼기, 베기, 벗기기, 썰기, 다듬기, 파기, 뽀개기...... 같은 인간의 동작을 받아내어 그 힘을 정밀하게 극대화시키는 연장을 만들었다.

 

342면

황병기 선생님께 자료를 소개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 말씀을 지금 그대로 옮기기는 기억이 멀지만, 요약하자면, 자료는 '별'이라는 것이었다. 밤하늘의 별은 우륵이 보았던 바로 그 별이고 또 지금의 별이니까 별은 가장 확실한 자료다......나는 별을 보고 했다......이런 말씀이었다.

 

442면

  솟구칠 때 고래는 머리로 아침햇살을 들이받았고, 잠길 때 고래 꼬리가 바다를 때려서 물보라가 일었다. 솟구치고 또 잠기면서 고래떼는 달려오고 또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