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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 紙千年

雅嵐 2020. 11. 5. 01:22

그레구아르와 책방 할아버지, 마르크 로제, 윤미연 옮김, 문학동네, 2020년 1월.

 

서가에 꽂힌 책 삼천 권과 함께 사라지고 싶다는

그 노인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다.

봄이 벚나무들과 함께하는 그것을.

 

304면

...내가 관심 있는 건, 종이를 만드는 연속공정에서 초지가 나오기 직전 마지막 표백 단계의 펄프 혼합 탱크에 접근하는 것이다.....  3킬로그램이 나가는 책방 할아버지의 유분을 100그램씩 서른 개의 꾸러미로 만들어 들킬 염려 없이 펄프 혼합 탱크 안에다 쏟아부으려면 어떤 트랩을 이용해야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다. 페로 제지공장은 아셰트출판사에 제지를 납품하는 업체로, 앞으로 여기서 이 년 동안 납품하는 종이로 그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문고판 책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피키에 씨, 알아요, 당신이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걸. 이게 얼마나 이상야릇한지 한번 보세요. 반짝이는 흰색 펄프 반죽 위에 점점이 이어진 잿빛 가루의 흔적, 흰색과 회색의 대비를 이루는 흔적은 물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이미 당신은 제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종이에 인쇄될 이야기를 향해 천천히 흘러가지요.

  저의 사수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에게 날마다 새로운 것들을 배운답니다. 그가 그러는데, 라틴어 'liber'에는 나무와 껍질 사이에 있는 얇은 막이라는 뜻도 있고, 그와 동시에 책이라는 뜻도 있대요. 피키에 씨, 아직도 당신에게 더 설명해야 할까요? 저의 히어로, 그건 나무예요.

 

쭈꾸미볶음콩나물, 죽순볶음, 양배추파프리카초절임, 팽이버섯대파맛살전, 김치

여학생모임

소모임이라서 무척 조심스러웠다. 6개월 만이다.

'손 씻기' '덜어먹기' '멀리 떨어져 앉기' '발언하는 사람은 마스크'......

 

아직도 조심스러운 세 분의 판단을 존중한다.

이전 모임에서 선정한 '개인주의자 선언'은

모임을 여러 번에 걸쳐 미루는 바람에 내용을 거의 잊었다.

다만 작년 12월에 메모해 둔 머리말 중 한상궁마마님의 말만

기억에 남았고 더는 아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책읽고 메모하고

그 메모가 자꾸 눈에 띄어서 기억이 생기는 것 같다.

아마도 무척 빠져 읽느라 메모할 기회를 잃고 끝난 것 같다.

 

이번에 선정한 '반일 종족주의'는

경독재님이 읽으셔서 궁금하던 차에

조정래와 진중권 논쟁의 발단이 된

기자의 질문에 이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대출이 막혀있어 도서관에서 못빌린 분도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신친일파-반일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도 읽을 수 있는데

뒤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앞의 책을 읽으려 하지 않는다.

뒤의 책, 못읽겠어서 빼고 읽거나 넘긴 곳이 많다고 한다.

나 역시 후딱 읽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난 둘 다 읽고 알고 싶다.

그리고

그때 그 어른들이 생존해 계실 때 자꾸 묻고

확인해서 기억해두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적물들도 남겨졌으면 좋겠다.

기록과 구술이 얼마나 허술하고 조작될 수 있는지...

 

일제 쇠말뚝은

측량기준점(대삼각점)으로,

그곳에 측량기 추를 맞추기 위한 기준점이라는 데 깜짝 놀랐다.

민족의 혈맥을 자르기 위한 토템?...

공학보다는 농경사회라서 다른 일들이 많이 생겼다.

결과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었던 일제쇠말뚝을 철수했다고 한다.

관악산을 오르며

수백개의 쇠말뚝을 박아 계단을 만든 것을 보고

'일제 보다 더 많은 혈맥을 끊었네.' 했었는데

궁금증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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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책을 선정해두니

마음 따뜻한 '단풍이모'가

'최근에 가슴시리게 읽었다'며 함께 읽자고 권했다.

 

세상에서 의미있는 일은

내 정신을 심어 후세를 키우고 싶은 일인 것 같다.

책방 할아버지는 황무지같은 그레구아르를

자연스럽게

스스로 자랄 수 있는 양분과 힘을 주었다.

'종수곽탁타전'의 나무와 같다.

blog.daum.net/inkbook/12860426

 

종이가 산화되면 부서진다.

그래서

화선지의 연습지와 작품지는 구별된다.

오래 전 써 둔 연습지가 누렇게 변색되며 부서지는 것은

보존재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지는

알칼리성 재료를 섞어 보존력을 높인다.

우리나라 작가들은 특히 폭폭한 작품지를 선호해서

지금은 굴껍데기 조개가루 등을 많이 섞는다고 한다.

출품 때가 되어

작품지를 많이 소모해서 쓰고 나면

방바닥에는 미세한 하얀 가루가 쏟아져 모인 생각이 난다.

紙千年이라고 했다.

오래된 묘터에서 편지 유물이 발견될 수 있는 이유이다.

작품은

반드시 작품지에 써야 오래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책방 할아버지 피키에 씨의 유분이 섞인 종이는

책으로 만들어져

천년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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