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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페이스북에서

雅嵐 2021. 8. 17. 16:18

김동연

8월 14일 오후 5:05

광복 76주년을 맞이해서 독립투사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있는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습니다. 일제 강점기 공포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무장 군경 1,000명에 대항해 홀로 시가전을 벌이다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자결한 분입니다. 서른셋 나이로 숨질 때 그의 품에는 직접 그린 태극기가 있었고 몸에는 11개의 총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마지막 11번째 총알은 스스로 머리에 쏜 것입니다.

영화 ‘암살’에서 쌍권총으로 총격전을 펼쳤던 하와이 피스톨, 영화 ‘밀정’에서 지붕을 넘나들며 수백 명의 일본 경찰에 맞섰던 김장옥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방문한 동상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있었습니다.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 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우리 역사에서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살린 것은 특권층이 아니라 김상옥 열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대장간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사업을 하던 청년이었습니다. 김상옥 열사의 동상이 화려한 곳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흔한 길 위에 있는 것에는 이런 뜻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로나, 경제와 민생 문제 등 어려운 상황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분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입니다. 의료진, 자영업자, 중소기업인, 농어민, 학생, 청년 등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역할을 하는 분들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대한민국 금기 깨기’를 위해서는 이런 분들이 중심이 되는 ‘아래로부터의 반란’이 필요합니다. 정치와 정책의 수동적 소비자였던 시민이 적극적인 참여자와 생산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기존의 정치판, 소수의 정치엘리트 등으로부터 나오는 위로부터의 시도로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나 대한민국의 변화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개인적인 감회도 남달랐습니다. 김상옥 열사처럼 저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서른 셋이셨습니다. 제가 서른 셋 나이였을 때 내내 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한 살 어린 젊은 아내, 자식 넷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을까 하는 생각에 늘 목이 메었습니다. 같은 나이에 자결 순국한 김상옥 열사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의 과제를 생각해 봅니다. 김상옥 열사 같은 분들이 광복을 이룬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부유한 나라가 아니라 남이 부러워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의 뿌리인 우리 사회의 ‘승자독식 구조’를 깨야 합니다. 더 많은 기회, 더 고른 기회를 만들어 경제의 역동성을 살리고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광복절을 맞아 이러한 시대의 과제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져봅니다. 김상옥 의사의 독립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DY.AfterYou]

김동연

7시간

제 신상에 변동이 생겨 알려드립니다. 얼마 전 ‘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을 사임했습니다. 8월 초 이사회를 거쳐 회원총회에서 사임인사도 드렸습니다. 최근, 그리고 앞으로의 제 행보를 감안할 때 비영리법인 대표직을 계속 맡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서입니다.

2019년 12월 ‘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설립 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만큼 보람도 컸습니다. 우리 사회에 혁신과 사회적 이동, 그리고 소통과 공감을 만드는 사업을 여럿 추진했습니다. 무보수 봉사, 투명한 재정 운영, 정부로부터 일체 지원 안 받기 등 약속도 지켰습니다.

법인에서는 그만두는 제게 새로운 자리를 하나 맡겼습니다. ‘시니어인턴’입니다. 새로운 인턴이 생겼다며 새 종이 명패와 명함을 만드는 사무국 직원들은 퍽 즐거워 보였습니다. 어제까지의 상사가 인턴이 돼서일까요? (ㅎㅎ..) 저도 인턴은 처음이라,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습니다. 마침 후임 이사장으로 훌륭한 분이 오셔서 마음 든든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다짐해 봅니다. 시니어인턴으로, 법인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정회원으로 제가 할 수 있을 일을 앞으로도 다하겠다고요. 비록 이제 법인의 대표는 아니지만,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모든 사업과 행사에 참여해 몸으로 봉사하겠습니다. 의사결정이나 사업수행에 있어서도 신임 이사장이나 직원들이 원하면 제 의견을 드리고 어떤 허드렛일도 마지않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유쾌한반란’과 저를 성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유쾌한반란’과 함께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저와 함께 ‘유쾌한반란’을 성원하고 동참해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이유로, 맡고 있던 다른 자리도 그만두었습니다. 한국방송대 석좌교수입니다. 다른 곳에서의 제의는 모두 거절했지만, 방송대의 간곡한 요청은 저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에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인하여 70년대 중반 상업고등학교 졸업도 전에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2년제였던 방송대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제 꿈이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계몽활동을 하는 것이어서 농학과를 택했습니다.

2주간 출석 수업을 해야 하는데 직장 초년병으로 휴가를 얻지 못해 결국 졸업을 하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저희 집안 통틀어 첫 대학진학자였고, 제 첫 대학의 적(籍)이 바로 방송대였습니다. 비록 1년도 못하고 석좌교수를 사임하게 되었지만, 그동안 몇 차례 방송 특강과 청주/충북, 대전/충남 재학생들 강연 및 간담회를 통해 학생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만두려니 섭섭합니다만,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방송대를 위하여 혹시라도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DY.After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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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반란 - 김동연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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