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전 전태일 청년이 스물세 살 나이에 분신한 날입니다. 평화시장, 하루 15시간씩 일했던 닭장 같은 일터 앞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외치며 몸에 불을 질렀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1년 3개월 뒤 저는 고등학교에 진학합니다. 당시 평화시장 바로 옆에 있던 덕수상고입니다. 지금은 두산타워가 되었지요. 학교를 다니며 그곳에서 미싱사, 시다라고 불리던 견습공들을 많이 봤습니다. 제가 다닌 상업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어려운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남 보듯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누이인 전순옥 선생은 “오빠는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 갔는데 너무 많은 사람이 폐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못 먹어 걸리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하며 폐결핵을 앓았고 제 주위의 친구 여럿이 그랬습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목 메이게 외치고 외쳐 봐도 눈 깜짝하지 않는 얼어붙은 세상. 그래도 난 두드려 보겠네.”
전태일 열사 일기에 나오는 대목들입니다. 아직도 우리 곁에는 수많은 전태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비정규직, 택배노동자, 배달노동자, 플랫폼 노동자들은 평화시장 미싱사, 견습공들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 기득권이 되어버린 공공,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은 전태일 열사가 꿈꾸던 모습일까요?
전태일 열사의 희생이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각성의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공정한 기회와 보상’, ‘안전한 노동환경’ ,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풀지 못한 숙제들이 많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염원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함께 나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한 말 중 가장 제 마음을 아프게 한 대목이 있습니다. “나한테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이웃의 친구인가요? 불공정한,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 그리고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