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에서 문자의 명칭은
뜻을 존중하고 소리를 공유하되 다른 문자와 구별되는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썼다.
예서는 례서이며 禮法을 갖추는 글자에서 음을 '례'로 공유하고
전서의 다음(next)이며 종속되는 뜻을 지닌 '隷'를 만들어 썼으며,
비문 등 기리는 문장의 머리 비액은 반드시 전서나 예서로 썼다.
그러므로 진서는 본질의 글씨인 전서나 예서를 뜻한다.
위아래로 긴 전서 길이에서 8/10을 버리면 납작한 예서가 되고
한예나 광개토대왕비처럼 정사각인 예서에서 8/10만 취하면 역시 위아래로 납작한 지금의 예서가 된다.
'여덟 팔'자의 예서는 좌우로 날개를 벋친 듯하여 예서의 특징을 잘 말해준다.
예법에 쓰이는 글자에 바른 글씨 해서가 포함되면서 혼란이 생기자
지금 서예에서 일컫는 예서는 '팔분서'라고 분리하여 칭하게 되었다.
후대로 오면서
주요 특징만 잡아 용어가 차츰 전서 예서 해서...로 칭하게 되었는데
진서와 예서의 뜻은 무엇이라고 고정할 수 없는 까닭에
서론의 문장에서는 시대를 잘 확인하고 내용을 잘 살펴서
그에 잘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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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서라 쓰고 례서를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의례를 연상하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
진서라 쓰고 진짜 글씨의 본질을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진리의 법도에 쓰이는 바른 글씨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는
천재
세종대왕!!!
【원문】
故亦傍(2)通 / 二篆, 俯貫八分(3), 包括篇章(4), 涵泳(5)飛白(6). 若豪氂(7)不察, 則胡越(8) / 殊風者焉.
至如鍾繇隸奇, 張芝草聖, 此乃專精一體, 以致 / 絶倫. 伯英不眞, 而點畫狼藉(1), 元常不草, 使轉縱橫. (自玆已 / 降, 不能兼善者, 有所不逮, 非專精也.)
【해석】
그러므로 또한 곁으로 대전ㆍ소전에 능통하고, 굽어 팔분서를 꿰뚫으며, 장초서를 포괄하고 비백서를 깊이 들어가 깨우쳐야 한다. 만약 지극히 적은 것을 살피지 않으면 호와 월나라 풍속의 다름과 같을 것이다.
종요 예서의 기이함과 장지가 ‘초성’에 이르는 것 같은 것은, 오로지 한 서체에 정통하여서 특출함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장지가 진서를 쓰지 않았다면 점과 필획은 어수선하게 어지러웠을 것이고, 종요가 초서를 쓰지 않았다면 ‘사전’은 가로세로 얽혔을 것이다.
【주석】
(3) 八分(팔분) : 한나라 예서의 별칭으로 팔분서라 일컫는다. 위ㆍ진나라 해서도 예서라 일컫기 때문에 당시 통행하였던 파책이 있는 예서를 팔분서라 하여 혼란을 방지하였다. 팔분서에 관한 다른 해석들이 많다. 혹 “글씨가 모난 팔분은 법도가 있다고 말한다.”라고 하여 팔분은 글씨를 쓰는 법도이나 점차 변천하여 서체의 명칭이 되었다는 것이다. 혹 한나라 예서의 파절)이 좌우로 향하여 갈라지니 “점차 ‘八’자처럼 분산하여 또한 명칭이 팔분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에 동조하는 설이 많았다. 일설에 “이사가 소전을 만들고, 정막이 예서를 만들었으며, 왕차중이 팔분서를 만들었다. 채문희는 이르기를 ‘정막의 글씨에서 8푼을 베어내고 2푼을 취하며, 이사의 글씨에서 2푼을 베어내고 8푼을 취하였던 까닭에 팔분서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4) 篇章(편장) : 장초서를 가리킨다. 이는 예서의 초서체로 또한 예초(隸草)ㆍ급취(急就)ㆍ행장(行章)이라고도 일컫는다. 명칭에 대한 해석은 각각 다르다. 혹 한나라의 사유(史遊)가 『급취장(急就章)』을 지어 붙여진 명칭이라 하였고, 혹 두도(杜度)가 초서를 잘 써서 한 장제가 조서를 초서로 쓰라 하면서 장주(章奏)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 하였으며, 혹 형체는 예서체를 덜고 감하여 글자의 대략만 남기고 결구는 뚜렷한 까닭에 붙여진 명칭이라 하였다. 근대 학자들은 대부분 장해(章楷)ㆍ장정서(章程書)에서의 ‘章’은 같은 의미로 보고 있다. 장초서는 한나라에서 탄생되었고, 특징은 글자마다 독립적이며, 각 글자에서 수필을 하는 곳은 대부분 파책을 띠고 있다.
(5) 涵泳(함영) : 물속에 들어가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가 잠겼다 하는 것으로 깊이 들어가 깨우친다는 뜻이다. 송나라 나대경은 『학림옥로』에서 “바로 도연명 시의 뜻은 글자 수는 적고 뜻은 많으며, 특히 깊이 들어가 깨우칠 수 있다.”라고 하였다.
(6) 飛白(비백) : 비백서로 채옹은 홍도문에서 장인이 석회로 빗질을 하는 것을 보고 계시를 받아 필획에서 실처럼 흰 것이 드러나는 이전에 없던 특수한 풍격의 비백서를 창조하였다고 한다. 비백서는 필획에서 실과 같은 흰 것을 드러내고, 체세는 표일하며, 마치 마른 붓으로 글씨를 쓴 것 같다. 이러한 서체는 궁궐에서 편액을 쓰는 데에 사용하였다. 위ㆍ진나라 때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비백서는 한 서체에 구애를 받지 않는 운필법의 하나이다. 처음 창조할 때에는 오로지 해서 필법을 운용하였다. 이후 제나라 소자운은 소전, 당 태종ㆍ고종은 행서ㆍ해서, 송 태종ㆍ인종은 초서에 운용하였다. 청나라에 이르러 비백서는 각 서체에 겸비하였고, 특히 장연창은 이를 인장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혹자는 ‘비백’이란 마른 필치에 흰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고, 일설에는 마른 필치에 우연히 흰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하였으니, 하나로 정할 수 없다.
(7) 묵적본ㆍ이현사에는 ‘豪氂’, 사고본ㆍ호남본에는 ‘毫釐’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8) 胡越(호월) : 호와 월나라로 넓게 북방과 남방의 각 민족을 가리킨다. 호는 북방에 있고, 월은 남방에 있으면서 멀리 떨어지고 막혀 자연히 풍속이 크게 달랐다. 한나라 추양은 「상서오왕」에서 “신이 들으니, 진나라는 곡대의 궁전에 의지하여 천하를 저울질하고, 땅을 그어 다른 사람이 범하지 못하며 병사는 호와 월나라를 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회남자ㆍ숙진훈』에서 “천지와 사방의 안에서 단번에 천만 리를 간다. 그러므로 다른 관점으로 보면 간과 쓸개는 호와 월나라처럼 떨어져 있고, 같은 관점으로 보면 만물은 한 우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1) 묵적본ㆍ사고본ㆍ이현사에는 ‘藉’, 호남본에는 ‘籍’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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