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자방고전 풀이

책만 보는 주부

서예/자방고전

'자방고전', 논문을 제출했다.

雅嵐 2019. 11. 5. 00:38

내 '자방고전' 논문의 기~인 여정

 

생각도 없고 되는 것도 없다.

죽은듯 감응도 없다가

느끼며 잇따라 통하니

하늘아래의 연고로 세상에서의 지극한 근기가 아니면

그 누가 이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  - 周易 繫辭 上 

(易, 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

뜻을 품은 사람은 마침내 일을 이룬다.

 

 

 1974년

 

 성균관대학교를 나오신 이명호선생님께 한문을 배우며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를 가기로 했다.

선생님 성함 중에 잘 쓰지 않는, 처음 보는' 하늘 昊' 한자가 신기해서 자꾸 써보곤 했다.

 

1977년

 

서예를 시작했다.

효천 김인석선생님. 구양순체만 글씨라고 하셨다.

'새벽 曉, 클 奭'을 처음 만나 자꾸 써보았다.

선생님께서는 매일 거르지 않고 붓글씨를 2시간 쓴다고 하셨다.

반드시 2시간이어야 한다고 하셨다.

부스럭대는 시간 빼고 집중하는 시간으로만.

(이 두시간의 개념은 평생을 혼자 써도 주부로서 지키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난 서도반 반장을 하며

방학때도 매일 나와 쓰고

창고가 되버린 서도실을 치우고 모포를 수도간에 가져가 빨간 다라이에 밟아 빨았다.

서체의 힘을 보고 후배들도 뽑았다.

 

1982년

 

한문학과는 야간대에 없다.

그 과가 있는 학교를 가서 공부하다 형편이 나아지면 주간으로 전과할까?

차선책으로 야간대 국어국문학과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1984년

 이성구 교수의 국어학특강

 '훈민정음'과 '최만리 등 훈민정음 반대상소문'을 공부하면서

 조금씩 수집한 자료.

 상소문이라는 프린트물과 붉은 글씨로 메모한 것들이

 최루탄 속에서 야간대 수업을 들으러 가는 도중 전경의 검열을 받았다.

 다행히 그 글을 읽을 줄 아는 선배 전경이 나를 풀어주었다.

 그 때의 그 상소문은 손으로 쓴 복사본. 지금도 곱게 파일에 꼽혀 있다.

 

 국어교육학 교재의 이응백 선생님 한 마디 '제자원리'를 찾아 복사해 두었다.

 

 3월 9일 달걀모양의 남산에 있던 중앙도서관,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직장 유니폼을 입은 채로

 나무로 된 도서목록 서랍에서

 대제각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찾아 복사실에서 전문을 복사해왔다. 

 

1987년

 

대산 김석진 선생님의 주역을 듣기위해 흥사단에 등록했다.

국어를 하려면 주역 공부를 하여야 한다.

 

 

1994년 7월

 

여초 김응현선생님의

문자발달단계를 따른, 석고문으로 시작하는 서예기초 줄긋기로

서예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에야 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서 기초를 신입 회원들에게 지도하며

한글 자모꼴과 너무도 비슷한 요소에 궁금증이 더해갔었다.


2010년

 

  끝내 획기적인 자료를 찾지 못한 채 광개토대왕비와 훈민정음 서체 관련성 연구 논문으로

 서예학 석사 졸업.

 

2014년 10월 11일

 

 KBS역사저널의 훈민정음 창제미스테리 '자방고전'이 의아스러웠다.

 내가 서예훈장을 하면서 매일 보고 있는 서체가 아직도 훈민정음 연구의 미제라니......

 TV프로그램이 책자로 나오면서

 조선시대 세종대왕에서 '훈민정음'을 빼고 출간되었다.

 매우 심각했다.

 

내게 충분히 사명감을 줄 만했다.

한자와 서예를 공교육으로 배운 마지막세대이면서

컴퓨터를 공교육으로 배운 첫 세대이기도 하다.

우리 세대가 아니면 영영 풀기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

 

2014년 한글날 한글박물관이 개관했다.

 

2016년 6월

 

 16년간의 서예강사로서, 모욕적인 파행이 내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서울둘레길 완주로도 회복하지 못한 내 정신세계를 조금씩 조금씩 지탱해주는 자료수집.

 '篆'으로 검색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생존 서예가 중 오래된 자료를 갖고 계실 분께 연락을 취했다.

관련 자료를 인용해 저술하신 분이다.

제자의 제자들이 겹겹이 호위하여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다.

기념관 관리 제자에게 문자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끝내 답이 없다.

 

세계에서 단 한 곳,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구할 수 있었다.

찾는 자료마다 그곳에만 있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어느 시골마을 도서관 한 곳에도 있었다.

오래되어서 표지 사본 밖에 안된다고 했다.

세번을 의뢰했더니... 전법운필 사본까지 왔다. 희열1.

 

 주민자치센터가 나를 버려줘서 고마웠다.

 

2017년

 

 논문틀을 완성하고 학술지에 투고하고자 하였으나

 회원가입 조차 허락해주지 않았다.

 국어학 전공 - 국어학 석사 - 박사과정, 연구실적, 강사활동 만이 가능했고

 국어학 전공 - 서예학 석사 로는 회원가입이 불가했다.

 가입비, 회비, 논문 심사비, 15면을 초과하는 면당 6만원.....

 

 맥이 풀리는 마지막 한 마디는

 "그렇게 해서 제출해도, 게재가 안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투고할 때마다 연회비 심사비 초과수수료를 부담해야 된다???

 몇몇 학회마다 암담한 일을 겪었다.

 서예 관련 학회에서는 절차조차 힘들었다.

 

 초기 자료수집 때  접했던,

 붓든이 김석환 님이 원고를 들고 한글 관련 단체마다 헤매고 다니다

 결국 개인이 출판으로 쏟아낼 수 밖에 없었던,

 분노섞인 한글 연구서의 머릿말이 나를 따라다녔다.

 

헌책방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3 복사해온 서적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이후로도 하영삼 샘이 번역한 책들을 꾸준히 구했다.

 

서예가로서 서예훈장으로서

문득 연락한 생면부지의 인터넷 검색자에게

가장 많은 자료와 공부와 베풂을 주신 분은 덕산 윤봉주 샘이시다.

 

 

2018년 5월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

깜짝 놀랄만치 한글같은 전서를 만났다.

 

초획인용분류법.

 

 

2018년 하반기

 

 석사학위 만으로 논문을 받아주는 한 곳에 간신히 투고했지만

 주부로만 살아온 글쓰기의 논술 방법은 논지의 중요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너무 욕심껏 번다하고 만연체였고

 책을 너무 많이 읽은 탓에 내 지식을 자랑하는 듯 저술을 했다.

 

각주가 90여개 달리고 참고문헌이 100권 넘었더니...

읽은 책을 다 참고문헌에 올리시는 건 아니지요...그랬다.

인용문에 있는 것은 올려야 하지 않나요?

읽은 책 모두 올리면 500권도 넘는데....

 

 그래도 거절당한 것에 분노하며

 다른 학회를 찾아 가입비와 연회비를 입금하고 제출했다.

 

 한문학 교수, 서예 교수, 서예학회 교수, 서론 교수, 서예술가, 국어서예 교육학,

역사학 기자, 역사학 교수,  국어국문학 교수, 서예 문자학자, 신문기자, 생활국어학자, 일본어학자......

 많은 분들을 찾아 뵈며 자문을 구했다. 대부분의 분들이 어려워 이해할 수 없다 하셨다.

 또 대부분의 분들이 날더러 '들이댄다'는 표현을 쓰셨다.

 나는 평소에 오래 존경을 해오던 분이지만 불쑥 연락하여 논문을 썼다고 봐달라고 내놓은

 결례의 소치였다.

 

 단 한 분만이 꼬박 두 시간을 한자리에 앉아 논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읽으셨다. 모암 윤양희 선생님.

 10년 후 쯤 내놓으라 하셨고, 그 뒤로 10년 후 쯤 책으로 내라 하셨다.

 그러시면서 "인용을 하는 자료는 그래도 수준이 되는 걸 갖다 써야지." 하셨다.

 

2019년 1월 22일

 

 근거를 뒷받침해줄 더 획기적인 자료를 찾아냈다. 육서.

 

 논술력도 어느정도 갖추어가고 있었지만 '게재불가'는 정말 의외였다.

 머리말에서 그간의 연구실적과 내 논문의 다른 점을 분명 제시하였는데

 심사의견에 지난 연구실적 단어를 명시하며 내 논문의 부당성을 들어 거절했다.

 심사위원들이 "머리말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국어학자들이 내가 연구해 낸 주요 한자를 읽어내지 못하였다.

 이해하지 못할 '어간' '어미' 연구서들이 수십개 그 학술지 해당 회에 등재되었다.

 

혹시나 심사위원들에게 노출된 논문 몇 마디가 걱정스러워

2019.3.27. 투고했던 논문 그대로 저작권 등록을 마쳤다.

 

 게재가 거부되고 회원탈퇴 불과 1개월 후

 2019년 5월 말, 이 학술단체 공식 홈페이지가 폐쇄되었다.

 논문으로 나라가 시끄럽기 시작하였다.

 

 

2019년 상반기

 

 그래도 국가기관이 낫다 싶어 처음 냈던 곳에 다시 제출하고

 '수정후 재심' 의견을 받았다.

 이전에 지적받아 삭제했던 부분 '언문'을 다시 살리라는 수정의견과

 '홍기문' '안자산'의 연구실적, 어떤 박사의 논문과 저서를 반영하라는 지침이었다.

 그리고 '띄어쓰기'

 35년 간의 내 국어학 연구 공백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교육지침으로

 연구가 제외되었던 학자들 이름이었다.

 

 

 홍기문과 안자산의 연구 깊이는 내 감동을 이끌어냈고 내 연구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다시 하루 5~6회 500번이 넘는 수정논문이 파일로 쌓이고

 도서관마다 100권 가까이 관련 책을 찾아 참고하고 정리했다.

 주부 신분으로서는 오직 국립중앙도서관과 한국고전번역원, 남산도서관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대출이 안되고 주부로서 시간이 여의치 않아, 읽다가 중요한 자료는 출력을 해와서 읽었다.

 장당 30~65원인 복사비 1년치가 8만원이 넘었고 지금은 몇 달 만에 또 그 금액이 넘었다.

신 개발품 복사기에 서툰 복사솜씨 때문에 자동으로 70장을 망친 날도 있다.

오늘 환산해보았더니 5,200장 쯤 되었다.

 

 

 한글도서관에서 띄어쓰기 책을 빌려오고 관훈클럽에서 '국어사전 바로잡기'를 보았지만

 띄어쓰기에 관한 규칙은 규칙다운 규칙이 없는 엉터리라는 결론이었다.

 원칙은, 국어사전에 낱말로 등재된 것은 한 단어로 보는 것. 단어와 단어는 띄어쓴다.....

 만일 사전에 등재할 때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비슷한 활용의 한 단어는 같은 꼴이어도

 사전에 등재되지 못했으면 띄어써야 한다.

바람 소리는 띄어 쓰고 울음소리는 붙여 쓴다. 띄어쓰기는 붙이고 띄어 쓴다는 띈다.

 그래서 각 출판사마다 따로 지침을 만들어 쓰는데 '열린책들' 것이 가장 모범된다 하였다.

 

좋아하던 녹색펜의 배신...

 

 

 아이가 다운받아 준 맞춤법 검사기로 먼저 검사를 하고.

 다음사이트 맞춤법 검사기에 논문 부분 부분을 드래그해서 검사하고

 오류의견을 받은 부분은

 다시 그 단어만 네이버 한글사전에 규정과 용례를 찾아 수정했다.

 

 

 접수자가, 띄어쓰기는 '맞춤법 검사기'를 사용해보세요...라고 해주었다면

 띄어쓰기만 22개를 지적해서 '게재불가'한 심사의견은 적어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붙여 쓴 넉자 단어는 모두 두 자씩 띄어쓰기 해야 했던 것이다.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어 6자가 되는 경우 나는 꼭 이쪽으로 붙여써야 내 말이 통했는데

지금은 니르고자 할 배 이셔도 띄어쓰기와로 사맛디 아니할새............

 국어연구의 공백과 디지털시대의 국어연구 방법을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예전 논문접수일을 기준으로

8월말...기다린다....9월 20일...마감 한 달을 앞두고도

투고 안내 공지도 없고 이메일도 오지 않았다.

이제 논문이 짓물렀다.

 

 

논문 접수기간이 아니라고 반려된 경력이 있는 터라-----

직원들을 귀찮게 하나 싶어 들었다놨다를 몇번 하다 걸었다 끊었다 하던 전화를...

침을 꼴깍 삼키고 걸었다.

"지금 접수하고 있는데요."

"한 달 전인데도 공지를 안하시고 이메일도 안오고 해서..."

"우리(???) 학회에는 공지 올렸습니다???"

국가기관 공식 홈페이지 공지사항에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19년 10월 11일 밤 12시를 넘기며

감격에... 눈물이 피~잉 돈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내게 주시는 선물이다.

16년동안 석고문 기초를 198명에게 붓으로 써주면서 한글만 생각했던 내게 주시는...

그랬던 내게 날카롭게 가해진 그 상처를 잊으라고 하시며

참으로 수고 많았다고...

당신만이 알고 인정해주시며

내게 건네주시는 선물이 내 눈에 띄었다.

논문 전체를 다 뒤집기 시작했다.

 

저자가 ' ....'으로 생략한 인용문을 찾다가

내가 인용한 고시의 두 명의 작가 이름이 조선왕조실록 다른 날짜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나를 위해 숨겨두시고 날짜도 바꿔놓으셨다.

검색도 되지 않는다. 아직 번역도 못해놓고 있다. 용가. 한유.

 

 

남산도서관은 나를 위해 3권씩 빌려주던 책을 7권씩 빌려주고

 

서울도서관 자원봉사 1년동안

그 어느 도서관보다 많은 한글창제 서적을 보유하여 두 배 대여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고,

봉사 틈틈이 아주 많은 책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희정당벽화 강의가 열려 김규진에 관한 많은 자료를 알게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문헌실에서

묵은 의자가 저절로 부서지며 꽈당하는 바람에 그곳의 사람들이

노쇄한 뼈 골절진단서라도 내게 될까

연구기간 내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게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는 나를 위해 고문헌 전시와 기증전을 바꾸어가며 열어주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 천자문, 동혼재, 독락당....

 

국립한글박물관이 2014년 10월 9일 개관하고 도서관도 문을 열었다.

집앞에서 한 번에 그 앞에 내려주는 버스가 있고 최근 발간된 한글 관련 서적이 모두 있다.

잇대어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수가 있는 용산가족공원은 내 눈을 쉬게 해주었다.

갈 적마다 나밖에 없는 원시림같은 비밀정원도 있고 이번엔 연꽃도 딱 한 송이 피었다.

국립한글박물관 도서관에서는 나를 위해 용비어천가와 훈민정음 강좌를 개최해주었다.

 

2018년 5월 13일 이윤석, 세종의 명으로 용비어천가를 짓다.

2019년 8월 11일 홍윤표, 한글로 한자를 배우다.

2019년 10월 6일 김주원, 훈민정음 해례본을 마주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오주연문장전산고를 비롯한 자학, 육서 관련 고전들이

속속 번역을 완료하고 동양고전이 함께 연계되어가는 중에 있어 검색할 때마다

더 많은 자료들이 내 논지를 확고히 해주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 훈민정음을 위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세종대왕의 어명이다.

 

'나랏말싸미'가 개봉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학자들은 영화니까... 무시한다.

한글날을 전후한 뮤지컬 ' 세종, 1446'

그 한글 창제 년도가 나를 분노하게 한다.

 

 

이명호, 김인석, 이순구, 이성구,

김홍철, 김규진, 권덕규, 하영삼, 윤양희, 홍기문, 안자산, 이상규, 홍윤표, 강신항 .... 학자 

서예와 한문책만 보고 계시는 덕산 윤봉주 선생님

찾아도 고심해도 풀리지 않아 찾아뵈곤 하면 언제나 내가 찾아내야 할 길만 가르쳐주신다.

절대!!! 해석을 해주시거나 직접적인 자료를 찾아 건네시진 않는다.

그러는 동안.... 풀린다.

 

고등학교 국어 이순구선생님께서는

책을 읽고 반드시 서지를 적는 습관을 길러주셨다.

저자, 역자,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기록하고싶은 쪽 면, 읽은 날짜....

고등학교때부터 읽은 책들은

그래서 서지정보가 빼곡이 기록되어

노트를 뒤적일 때마다 보게된 훌륭한 말들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간다.

 

 

제출처는

제출 마감을 3일 앞두고 이틀동안 서버점검을 한다고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토,일 주말이라 자료신청이 안되고 월요일은 휴관이다.

화요일. 당일이용권 발급 로그인이 안된다. 자꾸 날더러 회원이 아니란다.

기계를 바꾸어 발급해봐도 아니란다. 결국 한층 다시 내려가 안내석에 얘기했더니

회원가입은 했냐는 둥... 잘못눌렀다는 둥... 태도로 보아 분명 인턴경력 중일 것이다.

이곳에 인턴으로 될 정도면 실력 더하기 뭐일까.. 저 태도는...책을 다루고 학자들을 상대하는 곳....

 

디지털자료실에서도 로그인이 안된다. 회원이 아니란다.

몇번의 시도끝에 겨우 로그인되더니 예약시간이 경과되었다고 패널티 한 시간을 빼앗았다.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다행히도 메모해간 자료들을 시간 안에 모두 찾아 인쇄 출력 처리해두었다.

 

신청한 자료를 찾으러 서고신청대로 올라가

자료들 하나하나 간지를 챙겨 5권을 들고 복사와 출력실로 향했다.

자료 대출 신청 한도는 5권 뿐이다. 더 보려면 복사해놓고 반납하고

다시 신청하고 40분을 기다려야 한다.

 

서버점검으로 복사와 출력이 되지 않습니다. 안내문.

긴 휴일을 놔두고 서버점검...

단 한 장도 자료 출력을 못하고

빌린 책은 모조리 간지를 빼고 다시 서고로 반납하고

빈 손으로 왔다.

찬찬히 공지사항을 살폈다. 어느곳에도 안내가 없다.

 

두 공공기관의 서버점검 동안

훈민정음표를 만들었다.

표와 도판 작업은 늘 나를 애먹인다.

마음대로 사라졌다 올라붙었다

줄여도 안줄고 좁은 칸을 복사붙였는데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긴 칸이 붙여졌다.

면을 오른쪽으로 넘어 사라져간 표는 어떻게 불러들여야 할지....

그리곤 고집스럽게 줄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동그라미 따로 돌아다니고 없어지고....

그 동그라미들은 도판 뒤에서 한꺼번에 와르르 나왔다.

 

집안의

식구들이 한켠에 밀어두었던 노트북 5개를

차례차례 폐기시켰다.

대형 컴퓨터도 껍데기만 남겼다.

큰 용량의 도판이 20여개 움직이면서 무리를 가해 수명을 끝나게 했다.

쓰다가 건네준 하드는 한 대씩 패야 10대 쯤 맞고 작동이 된다.

다행히도 아침 저녁 수정하는 대로 날짜와 서수를 두어

USB에 저장해 두었기에... 살...았...다....

 

추가 자료들을 복사해와서 내 논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조금씩 단어와 숫자를 손보고 보완했다.

2014년 10월 11일 이후

딱 5년 하고도 1주일을 넘겼다.

 

2019년 10월 20일 자정 마감...

가족들 밥해가며 빨래 해가며

논문을 제출했다.!!!

 

ㅠ..ㅠ...

또 30일까지 마감 연장이다.

논문을 빼앗길까 불안하고 조바심난다.

주부가 쓴 논문이라서 걱정이 많아진다.

 

2019년 10월 30일

玄應의 一切經音義

고전을 공부하려면 책의 구성을 먼저 파악해야 함을 느꼈다.

깨알같은 손으로 쓴 한문 한 권의 책 안에서

단 한 글자 '諺'을 찾기 위해

구조 파악하는 데만 4시간이 걸렸다.

혜림과 현응,

피휘로 인하여 원응으로 고쳐져 있었다.

 

그리고 논문 한 줄의 문장을 고쳤다.

진과 언

 

한 줄을 첨가했다. 날짜도 하루가 지난 뒤 새벽.

 

훈민정음을 소헌왕후 상중에 반포했다???

더 이상은 수정이 되지 않는다.

하찮은 바람 소리 학 울음소리나 일상의 닭 홰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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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 그리고 COVID-19가 시작되었다.

        일반인으로... 어느 도서관 어느 기관도 문헌을 참고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