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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學下達上학하달상 -下學上達

雅嵐 2024. 2. 18. 05:15

象形一太極太極本無極下學上達可於此而得之兼可以其進而然之哉

건은 태극을 상형하여 본래 다함이 없이 아래로 향하고 배워서 위로 도달한다

여기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나아갈 수 있음이다.

 

하늘의 기운은 보이지 않으나 그것이 꽉 차면 아래로 향하여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태가 된다. 

다시 그것이 누적되면 그 기운이 위에 이르게 된다.

아래의 사람은 스스로를 높이려면 배우는 수밖에는 없다.

이르려 하는 마음을 쌓고 또 쌓으면 하늘이 감응을 한다.

그래서 반드시 내려주신다.

기운이 모여 무겁기도 하고. 구름이 차면 비가 내린다.

 

'건수계보', '기일(건)성문도', '초획인용분류법'....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 문장은 문자학에 적용한 문장이다.

아래 글에는 '爲'와 '自'에 관한 해석을 감히 하지 못한다고 하였고

'而'가 '本' 자리에 들어가면 둘로 다른 존재가 됨을 풀이하였다.

 

한자의 한 글자나 한 단어만 뽑아내어 어느곳에나 입력하여 똑같이 해석하면

그것은 열 사람의 논의가 들어가는 풀이가 아니라 기계적AI OUT PUT이 나온다.

한자공부가 어느정도에 이르렀다면

한 글자마다 자전 몇 가지를 더 동원하여 제2 제3 등등의 뜻풀이를 적용해보자.

훨씬 유연하면서도 깊은 사유에 도달할 수가 있다.

 

下學而上達知我者其天乎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것 그것이 위의 으뜸(하늘)이다.

君子上達小人下達

군자라면 위에 이르러서는 스스로를 소인으로 낮추고 겸양하여 아래에 이른다.(군자는 위에 이르고 소인은 아래에 이른다? 군자는 높은 학문을 배우고 소인은 낮은 학문을 배운다? 철학이 없는 해석같다.)

 

그러나 가장 최고의 어려운 풀이는 직역이다. 

오랜 사유와 문장 다듬기를 거쳤어도

많은 현학자들의 논의에 기반으로 내놓기 위한

겸손하고 순수하고 서투른 마음, 사유가 누적된 표현이 있어야 한다.

 

정조실록의 이 부분은 실로 어마어마한 논의가 있어

다 읽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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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소장된 태극도설고정본(太極圖說考正本)에 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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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서는
정자(程子)나 소강절(邵康節) 등 제 선생(諸先生)은 이야기한 적이 없었고,
건도(乾道 송 효종(宋孝宗)의 연호) 경에 주자(朱子)가 처음으로 책으로 펴낸 것으로서,
당시의 국사(國史)인 주염계(周濂溪) 본전(本傳) 중에 
지금은 탈본(脫本)을 이미 바로잡은 것이다. 
태극도설 원문(原文)이 실려 있는데, 자(自)ㆍ위(爲) 두 자(字)가 많다. 
무극(無極)으로부터[自] 태극(太極)이 되었다[爲]고 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옥산(玉山)에서 홍용재(洪容齋)- 곧 홍매(洪邁)임.- 를 만나
태극도설을 말하다가
자(自)ㆍ위(爲) 두 자를 가지고 이는 사관(史官)이 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또 부록(附錄)을 고찰하면 주자가,
“대체로 본문(本文)이 완전 명백한 것을 가지고
오히려 이를 함부로 비평하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이 두 자를 더한다면
선현(先賢)에게 누(累)가 되며
후학(後學)에게 의혹을 열어주는 것이 더욱 깊을 것이다.” 
주자의 말은 여기서 끝났다.
고 하였다.
대체로 자(自)ㆍ위(爲) 두 자가 있고 없음에 따라
내용에 관계되는 것은 매우 크다.
그대로 두면
태극(太極)에 앞서서 다시 한 물체가 있게 되어
점점 공적(空寂)한 데로 빠질 것이므로 교훈이 될 수가 없고,
없애면
무극(無極)이란 두 자는 태극을 형용한 화두(話頭)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도설(圖說) 하단에,
“태극은 본디 무극(無極)이다.[太極本無極]"
고 하였는데,
그 구절을 자세히 탐구하면
도리어 태극 이전에 본디 무극이란 한 기운이 있어서
그것이 변동하여 태극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만일 이치에 밝은 군자(君子)를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그에게 한 번 물어 보겠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84
 

 

 

여기서 태극본무극(太極本無極)이라고 하였는데

위 글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서
이(而) 자를 반드시 가볍게 보고 지나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의심스럽지 않지만
이 구절의 본(本) 자와 이(而) 자는 약간 다르다.
이미 본이라고 말했은즉
태극이 무극에 근본한다는 혐의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로 보는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본 자의 뜻을 우선 상세히 말해 보라.
[심염조가 대답하였다.]

본(本)이란 말은
바로 본래 이와 같다는 말이고
이(而)란 말은 연결하는 어조사입니다.
위 글에서는
이미 무극을 먼저 말하여 태극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이 이(而) 자를 놓아서 그 말을 연결시킨 것이니,
만일 다른 자를 놓는다면 바로 두 개의 극이라는 혐의가 있게 됩니다.
아래 글에서는
태극을 먼저 말하고 그 원래 무극이라는 뜻을 미루어 말하였기 때문에
이 본 자를 놓았으니, 만일 다른 자로 바꾼다면
본래 하나의 극이라는 뜻을 밝힐 수 없습니다.
이 자와 본 자는 글자를 쓴 것은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다름이 없고,
순서대로 말하고 거꾸로 말하는 즈음에
말은 비록 다르지만 용처는 각기 마땅합니다.
이런 곳은 미루어서 융통성 있게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33-3】
“수장에서 말한바
‘희로애락이 아직 발하지 않은 때의 중〔喜怒哀樂未發之中〕’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고,
이 장에 말한바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無聲無臭〕’는 것은 ‘태극본무극(太極本無極)’이다.”
라고 하였으니,
호병문의 이 말은 참으로 지극히 합당하다.
여기에 대해 투철하게 보고 분명하게 설파할 수 있다면
《중용》 전체의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곳곳마다 꿰뚫을 수가 있을 것이다.
부디 깊이 생각하여 명확하게 분변해 보라.

신은 답합니다.
요로는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上天之載無聲無臭〕’는 것은
미발지중(未發之中)이요 천명지성(天命之性)이니, 《중용》 전체의 귀결처이다.” 하였습니다.
호병문은 또
“자사가 제1장에 제기한 미발지중(未發之中)은
주염계가 말한 ‘무극이태극’이고,
제33장에서 요약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하늘의 일에 귀결시킨 것은
주염계가 말한 ‘태극본무극’이다.” 하였습니다.
요로와 호병문의 설이 대략 동일하지만,
호병문은 주염계의 설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이 더욱 정밀합니다. 
대개 무극이면서 태극이요, 태극은 본래 무극이고 보면,
이것이 곧 ‘처음에 일리(一理)를 말하고,
중간에 흩어져 만사(萬事)가 되었다가,
말미에 다시 합하여 일리(一理)가 된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온전한 본체와 광대한 작용을 말한 책입니다.
첫머리에 일리를 말하고, 중간에 만사가 된 것은 곧
본체의 일(一?*건)에서 비롯하여 작용의 만수(萬殊)에 도달한 것입니다.
말미에 다시 합하여 일리(?*건의 이치)가 된 것은 곧
작용의 만수에서 비롯하여 본체의 일(?건)로 돌아간 것입니다.
풀어 놓으면 우주에 가득 차고
감응하면
마침내 천하의 일〔天下之故〕에 통하는 것은 심(心)의 작용이고,
거두어들이면
은밀한 데에 갈무리되어 고요히 움직임이 없는 것은 심의 본체입니다.
이미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하였으면
태극을 지극히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고 말한 것은
일리(一理?*건의 이치, 곧 하늘의 이치)가 지극하여 근본에 돌아감을 형용하기 위한 때문입니다.
《중용》에서
맨 앞에 ‘천(天)’을 내세워
나에게 있는 도는 하늘에서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뜻을 밝혔고,
마지막에 ‘천’으로 맺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묘한 덕으로 요약하여 귀결시켰습니다. 
염계의 설명이 이것과 어찌 다른 것이겠습니까? 가령
《중용》의 말미에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비유를 말하지 않았다면
《중용》 전체의 요지를 요약하여 말한 것이 되기에 부족하니, 예컨대
태극에서 무극을 말하지 않았다면
만화(萬化)의 근본이 되기에 부족한 것과 같습니다. 이런 까닭에 
호병문이 또
“자사가 처음에는 천지(天地)를 가지고 공자를 비유하다가,
종국에는 공자가 곧 천지라고 하였다. 또
30장의 말미에서 ‘천지가 위대하다.〔天地之大〕’라고 하지 않고
‘천지가 위대한 까닭이다.〔天地之所以爲大〕’라고 하였으니,
공자는 바로 태극일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본다면
공자가 태극이 되는 까닭과
《중용》이 공문(孔門)에서 전수하는 심법(心法)이 되어
‘태극은 본래 무극’이라는 이치에 꼭 부합하고 있음을 절로 묵묵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3개의 장의 은미한 말과 심오한 뜻에 대해서는
주자가 《중용장구》와 《중용혹문》에 남김없이 모두 밝혀 놓았으니,
배우는 이가 실로 시종을 종합하여 깊이 생각한다면

자사의 뜻과 주자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여기에서 ‘태극은 본래 무극이었다.[太極本無極]’라고 하였다.
윗글의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고 한 구절의
이(而) 자를 반드시 가볍게 보고 넘어간다면 그다지 의심스러울 것이 없지만 이 구절의
본(本) 자와 이(而) 자는 차이가 있다.
‘본래’라고 말한 이상
태극이 무극에 뿌리를 두는 혐의가 있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를 두 개의 극(極)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본(本) 자의 뜻을 상세히 말해 보라.”
하니, 심염조가 대답하기를,
“윗글에서는
일단 무극을 먼저 말하여 태극의 뜻을 밝혔기 때문에
이 이(而) 자를 써서 두 개의 극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아랫글에서는
태극을 먼저 말하여 원래의 무극의 뜻을 미루어 말하였기 때문에
이 본(本) 자를 써서 본래 하나의 극이라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
사용한 글자는 비록 다르지만 용처(用處)는 각기 타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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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전번역원 | 박한라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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升木說 

上下無定位。高卑無定名。有下則必有上。無卑則安有高。因下以爲上。升高以自卑。高者卑之積。下者上之漸。恒乎高者。其高易卑。樂乎上者。其上可下。

 〈승목설(升木說)〉
○ 윗자리나 아랫 자리의 일정한 지위가 있는 것이 아니요, 높든 낮든 정해 놓은 명예도 없는 것이다. 아래가 있으면 반드시 위가 있고, 낮은 것이 없으면 어찌 높은 것이 있으리오. 아래가 있으므로써 위가 되는 것이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낮은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요, 아래는 위에 오르는 계단이다. 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높은 자리가 낮은 자리로 바뀔 것이요, 윗자리를 즐기는 사람은 그 윗자리가 아랫자리가 될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역) |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