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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누구인가(김진애) 중에서

雅嵐 2007. 1. 4. 11:26

 

 내가 집에 있기 제일 좋아하는 때는 비 올 때다.

주룩주룩 장마비가 지루하게 내려서 눅눅하고 축축하면 차마

비를 즐길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비가 좋다.

 살아봤던 집 중 한여름을 났던 집은 유리천창이 온 사방에 있던

집이었는데, 그 천창 여러 군데에서 비가 샜었다. 그것도 항상

같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기저기 주전자와

사발을 갖다놓고 물 떨어지는 다양한 소리를 노래처럼 들으며 한 철을

지냈던 추억이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집에도 여름 장마가 네닷새 심하게 계속되면

두세군데 물이 새는데 영 근원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막무가내로 비가 놓다

 창문에 흐드드득 빗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안온한 느낌과 모험의 느낌이

같이 든다. 침대 바로 위에 비스듬한 천창이 있는데 그 유리창에 비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자면

그렇게 행복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마치 보호받는 듯하고 이불 속에

있는 게 그리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런가 하면, 새벽녘에 시원스레 천창을 때리는

굵은 빗발 소리에 잠을 깨면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프게 가슴이 설렌다.

빗소리는 무언가 모험을 하고 싶게 하는 소리다.

 

  비 ... 소나기 냄새

 

 내가 좋아하는 냄새 중의 하나가 '소나기 냄새'다.

사실 비 냄새라기보다는 비와 흙, 비와 먼지가 섞이며 생기는 흙냄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것을 소나기 냄새라 부른다.

굵은 소나기가 갑자기 뿌리면 흙에서부터 올라오는 그 순간의 냄새는

무어라 표현할까. '온 세상이 변하려는 그 순간의 냄새'다.

특히 흙마당이 있는 집, 시골의 흙길, 학교 운동장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그런 변화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하나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 집에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당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다.

옥상에 조그만 정자라도 하나 지으면 그 느낌을 다시 만끽할 수 있을 텐데 하고 궁리

하고 있다.

좋아하는 소나기 냄새를 맡으며 살고 싶다.

 

* 서예작품을, 그것도 한글 궁체를 전시장 가서 한 자도 안빠뜨리고 읽은 것은

  윗 글이 처음일 겁니다.

 2005년도 김도연님의 서울미술협회 입선작을 읽고 감격해서 김진애님의 책도

 샀습니다. 이 글대로 집을 짓는 김진애님과 그의 글과, 또 이런 글을 발견하여

 깨알같은 글씨로 숨죽여가며 써내려갔을 김도연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여기 출품하려고 썼다 골라내고 버린 작품들은 또 얼마나 되실지...

 전시장에서 찍은 작품인데 감히 여기 올립니다.

  - 이 집은 누구인가, 김진애, 한길사,2004, 1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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