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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발사믹식초, 포도잼...

雅嵐 2020. 9. 6. 04:44

블로그 지난 기록을 찾다보니

몇년 전 9월 4일에도 나는 이것을 하고 있었다.

 

여러해 전 뉴스에서는

성당의 1년간 쓸 포도주를 위해 수녀님들이 이렇게 생긴 포도를 수확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때를 맞추어 수확할 수 있었다.

신맛 떫은맛 단맛이 아주 적절할 때였다.

 

요즘은 그런 뉴스가 나오지 않는다.

때를 지나면 포도가 저 모양이 된다.

올해는 장기간 비로 인해 피해가 더 심각했다.

벌 거미 나비... 벌레들 새들은 용케도 알맹이를 콕 집어낸다.

 

종자가 청수포도라는데

시중에 나와 있는 그 이름의 포도와 그 맛을 보면

우리집의 포도와는 많이 다르다.

 

결혼해서 처음 이 포도를 만났을 때 어머님은

"익을 무렵되면 모두 이렇게 말라버린다"고 내게 미안한 눈길을 주셨었다.

병나고 말라가는 포도를 보면 그 눈길이 생각난다.

검색을 해보니 포도병 중의 하나이고 약이 없고 고칠 수 없다.

 

자주 올라가 돌보기 위해 알미늄 사다리를 마련하고

앉아서 작업할 수 있도록 지지대를 높이고

태풍이 뒤집지 못하도록 기둥을 시멘트 속에 박았다.

어떤 해에는

땅이 얼기 직전에 생선가게 가서 부산물 한 통을 얻어 깊이 파고 묻어주었다.

또 어떤 해에는

아주 야박하게 가지치기를 해서 몇 바가지 정도 튼튼하고 실한 포도를 얻었다.

새콤떱덜달콤한 적기를 알아서 수확을 잘 하면

맛나고, 청포도지만 맑고 불그레한 포도주를 담글 수 있었다.

몇년 전부터는 설탕도 술도 안넣고 으깨어 항아리에 방치했더니

초산층이 두껍게 생기면서 역시 불그레한 발사믹식초가 되어

2:1:1로 담그는 장아찌에 기가 막힌 맛을 내게 되었다.

작은 병들을 모았다가 여학생모임에서 나누어줄 수도 있게 되었다.

 

이번엔 포도고르는 내 어깨에 턱을 밀착하고 조르는 아이의 부탁으로

처음 포도잼을 만들어본다.

언젠가 대비없이 불어닥친 태풍이 뒤집어놓은 포도알을 갑자기 모아

부피를 줄이기 위해 잼을 만들어 망친 적은 있어도...

포도주나 식초보다 고되다.

큰 바가지 하나가 겨우 작은 잼병에 하나 나온다.

 

아파트가 많이 올라 자녀에게 증여를 하면

그곳에 거주를 못하는 자녀는

시가에 임박하게 오른 전세를 빼거나 보증금과 월세를 받고 관리를 하고...

결국 돈은 흩어지고 아파트라는 껍데기만 남는다.

 

낯선 동네분이 지나가며 말을 건넨다.

올 해 이 포도가 열리는 것을 지나며 볼 적마다 정말 위안이 되고 좋았다고...

이 포도는 수확용이 아니고 동네 관상용이다.

 

시기를 맞추어 가지를 쳐주고 순을 두 번쯤 따주고 청소를 해가며

이렇게 행사를 거쳐야 할

내 부지런함의 약속이며 책임이며 의무이다.

논산어머니와 이 청포도...

무한의 정신력을 단련시키게 물려주신 소중한 유산이다.

 

아마도 내가 아프기 시작하는 어떤 날

이 포도도 온 동네에 표시를 내며 알릴 것이다. 아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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