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자방고전 풀이

책만 보는 주부

서예/창작

1999년 9월 29일 - 이색 부벽루

雅嵐 2022. 3. 6. 09:00

이 시의 내용과 지은이가 좋아서

2001년 신사년에도 다시 창작을 해 보았다.

노트에 자전 면표시와 손글씨가 남아있어서

후에 언제든 뒤적이며 고쳐서 재창작을 할 수 있었다.

부벽루(浮碧樓)

                                              이색(李穡)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 昨過永明寺

잠깐 부벽루에 올랐어라 / 暫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기린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고 / 麟馬去不返

천손이 어느 곳에 노니는고 / 天孫何處遊

길게 휘파람 불고 바람 부는 언덕에 서니 / 長嘯倚風磴

산은 푸르고 강은 저대로 흐르더라 / 山青江自流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 | 1968

 

이색(李穡, 1328~1396) :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라서 목로(牧老)라고도 한다. ()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귀국하여 우대언(右代言)과 대사성 등의 벼슬을 지냈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문하에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학문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절개를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저서에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등이 있다.

 

천손(天孫) :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인 동명왕(東明王)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동명왕이 평양(平壤) 대동강 부벽루(浮碧樓) 아래의 기린굴(麒麟窟)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러 이 말을 타고 조천석(朝天石)으로 나가서 하늘에 올라가 조회(朝會)했다고 하는데, 이 전설이 부벽루에 대한 시에 자주 인용되어 왔다.

부벽루(浮碧樓) : 평양 을밀대(乙密臺) 아래, 영명사(永明寺) 동쪽에 있는 누각이다.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에 속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平壤府

목은집(牧隱集)해제(解題)

임형택(林熒澤)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成均館大學校 漢文敎育科 敎授)

 

1. 머리말

 

이 책은 14세기-고려 말의 위대한 문장가로서 당대에 사회 정치적 비중이 높았던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목은집(牧隱集)을 국역한 것이다.

목은집은 원본이 시고(詩藁)35, 문고(文藁)20권에 목록 3권으로 도합 5829책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이다. 이에 앞서 이규보(李奎報)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거질로 손꼽히는데 모두 5314책이니 여기에는 못 미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한자를 의사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한 이후로 신라 말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배출하였고 고려 시대로 들어와서 먼저 이규보를 배출하더니, 그 말엽으로 넘어와서 이제현(李齊賢), 그리고 이색이 출현한 것이다.

목은집은 역사 전환기를 증언하는 자료요, 민족문화의 귀중한 유산이 될 뿐 아니라, 한자 문화권에서 보편적 가치를 구현한 문헌이다. 목은집은 응당 한문적 형식으로부터 풀어내서 독서 대중 일반에게 제공되어야 할 터이나 워낙 중난한 작업이 되어서 지금껏 부분적으로 초역되는 데 그쳤다. 이번에 한국고전번역원이 목은집의 완역에 착수한 것은 만시지탄(晚時之歎)이 있으니, 오히려 더욱 성사(盛事)라고 하겠다.

 

2. 목은(牧隱)의 시대와 행적

 

목은 이색은 고려 충숙왕 15(1328)에 태어나고 조선 태조 5(1396)에 돌아가서 생애가 두 왕조에 걸쳐 있다. 동 기간은 중국 대륙에 있어서도 원명의 교체기였다. 이 시기의 역사를 주도했던 한 사람인 정도전(鄭道傳), 수덕언무(修德偃武)는 동문(同文)의 세계에 공통된 과제이니 예악을 제정하고 인문을 양성하여 천지의 질서를 세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고, 자기 시대를 문명의 전환기로 인식하였다. 응당 이에 동참해야 할 것으로 각성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목은의 위상을 정도전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우리 동방은 비록 해외에 있으나 대대로 중화의 문명을 흠모하여 문학의 선비들이 전후로 이어졌다. 고구려에 을지문덕(乙支文德), 신라에 최치원이 있었으며, 본조(本朝 고려를 지칭함 - 인용자, 이하 같음)에 들어와서는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과 학사 이규보(李奎報)가 빼어난 존재이다.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계림(鷄林)의 익재 이공(李公 이제현(李齊賢)) 같은 분이 비로소 고문지학(古文之學)으로 창도하니 한산(韓山) 가정(稼亭) 이공(李公 이색의 친부인 이곡(李穀)을 가리킴)과 경산(京山) 초은(樵隱) 이공(李公 이인복(李仁復))이 좇아서 화답을 하였다. 지금 목은 이 선생이 일찍이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데다 북으로 중원에 가서 배워 사우연원(師友淵源)의 바름을 얻었고 성명도덕(性命道德)의 이론을 궁구하였다. 그리고 동방으로 돌아와서 제생(諸生)을 이끌어 지도하니, 영향을 입어 일어선 자로 오천(烏川) 정공 달가(鄭公達可 정몽주(鄭夢周)), 경산(京山) 이공 자안(李公子安 이숭인(李崇仁)), 반양(潘陽) 박공 상충(朴公尙衷), 밀양(密陽) 박공 자허(朴公子虛 박의중(朴宜中)), 영가(永嘉) 김공 경지(金公敬之 김구용(金九容)), 권공 가원(權公可遠 권근(權近)), 무송(茂松) 윤공 소종(尹公紹宗)을 들 수 있다. 불초한 나 또한 이 여러 군자의 대열에 참여한 것이다.

(鄭道傳, 陶隱文集序)

 

위 인용문의 말미에서 정도전이 자기 자신을 포함해 거명한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권근, 윤소종은 한국 역사상 신진 사대부로 일컬어지는 인물군으로 곧 역사 전환기의 주역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목은 이색의 인맥이며, 한 세대 거슬러 올라가면 익재 이제현의 고문지학(古文之學)에 닿는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제현이 주도한 고문(古文)은 역사 전환의 정신적 준비였던 셈이다. 목은은 익재의 고문학을 계승한 바탕 위에 자신 또한 직접 중국에서 유학, 즉 성리학을 연구하고 돌아와서 차세대를 배양한 것이다. 요컨대, 고문학에다 성리학으로 확충한 목은 이색의 문학적 역량이 전환기의 역사를 담당한 주역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이 시대는, 동서고금에 흥망기가 으레 그렇듯 기복이 심하고 내우외환이 겹친 고비였다. 그때에 처한 일반 인간의 삶이 평온할 수 없었음은 말할 나위 없겠으나 특히 각성한 인간의 경우 고뇌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위의 목은 인맥을 보더라도 모두 신진 사대부로서 계급적으로, 그리고 의식의 측면에서 동류로 묶여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요점이 된 정치적 이슈에서 서로 엇갈렸으니, 정도전으로 대변되는 왕조를 혁명하자는 급진파와 정몽주로 대변되는 왕조만은 유지하자는 온건파로 대립한 것이다. 목은의 69세의 일생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하였거니와, 그는 국중의 원로로서, 신진 사대부의 선배 된 위치로서 더욱 입장이 곤혹스러웠으리라는 점은 얼른 짐작이 간다.

 

목은의 가계는 고려 말의 신진 관인층 - 사대부 계급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 거족의 하나로 올라선 한산 이씨(韓山李氏)이다. 가정목은 부자를 배출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굳히게 된 것이다. 목은이 태어난 해는 고려 충숙왕 15년이며 태어난 곳은 외가인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괴시(槐市 호지말) 마을이다. 그는 외가에서 2세 때까지 자라다가 고향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본가로 돌아왔다. 19세에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결혼하고 20세에 유학을 떠날 때까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한 기간에 구재(九齋)의 각촉부시(刻燭賦詩)에 참석하여 재능을 과시한 바 있으니, 강화 교동(喬桐)의 화개산(華蓋山), 경기의 삼각산감악산(紺嶽山)청룡산(靑龍山), 충청도 서주(舒州)의 대둔산(大屯山) 등지에는 그의 독서처가 있다.

 

그는 원()나라의 서울인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가서 벽옹(辟雍 우리나라의 성균관에 해당함)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그의 부친이 원나라 정부의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입학의 특전이 주어졌으며, 그쪽의 학자로 이름 높은 우문량(宇文諒)구양현(歐陽玄) 등과 종유(從遊)한 것도 특기할 사실이다. 구양현이 그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 의발이 해외로 전하게 되는구나.[衣鉢當從海外傳]”고 격찬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중간에 부친상을 당해서 귀국, 26세 때에는 고려 정부에서 실시하는 문과에 급제한다. 이때 사관이 마침 익재 이제현이어서 익재와 좌주(座主) 문생(門生)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27세 때에 마침내 원나라에서 실시하는 회시(會試) 및 전시(殿試)에 영예롭게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에 임명된다. 부친 가정이 대도에서 활동할 무렵 그에게 지어 보낸 시가 있다.

 

남아는 모름지기 제도(帝都)에서 벼슬해야지 / 男兒須官帝王都

자아를 세우려면 두루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若欲致身均是勞

너는 공자께서 천하가 작다 한 말씀 기억하리라 / 汝識宣尼小天下

자기 몸이 태산의 정상에 올라선 까닭이다 / 只緣身在泰山高

 

공자는 일찍이 태산에 올라 둘러보고서 천하가 작구나.”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는바, 태산의 정상과 같은 높이로 독서와 학문을 길러서 자신의 역량을 확충하라는 뜻이다. 목은은 부친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독서를 열심히 하고 유학까지 가서 드디어 당당히 제도에서 벼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왕의 수도에서 목은의 벼슬살이는 길지 못했다. 29세 때인 1356년 봄에 귀국을 하였다. 표면상의 이유는 모친의 연로함이었으나 그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사해는 연진으로 어두운데 / 回頭四海煙塵暗

구름 위로 높이 떠 날아가는 한 마리의 고니 / 雲表高飛一箇鴻

(還家, 詩藁 卷4)

 

그때가 원나라 연호로 지정(至正) 16, 고려 공민왕 5년이다. ‘연진으로 어두운 사해’ - 천하 대란의 시국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고국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을 구름 위로 높이 뜬 고니에 비유하고 있다. 그 무렵 원나라가 붕괴되면서 대륙이 혼란의 소용돌이로 들어갔거니와, 고려는 공민왕의 개혁 정치가 펼쳐지는 상황이었다.

 

목은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12년 후인 1368년에 주원장(朱元璋)의 명()이 선포되었다. 원이 대도에서 쫓겨나 막북(漠北)으로 밀려나서도 대치 상태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대륙의 정세가 뒤바뀌고 한반도에서 신왕조가 성립되기까지에는 24년의 시차가 있었다. 그사이 고려 왕조는 공민왕의 불미스러운 죽음 및 그 이후의 유동적 상황을 거쳐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으로 대세가 돌아가서 1392년에 조선 개국이란 결말에 이른 것이다. 목은은 그 자신이 결코 희망하지 않았던 이 결말을 목도하고 5년 후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과정에서 목은의 생애를 보면, 어두운 중국 대륙을 뒤로하고 돌아온 그는 기다렸다는 듯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중용된다. 귀국한 당초에 이부시랑 한림직학사(吏部侍郞翰林直學士)의 자리가 그에게 주어졌으며, 나중에는 신하로서 최고 지위인 문하 시중(門下侍中)에 이르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의 봉()을 받았다. 그가 맡은 주임무를 꼽아보면,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는 문한 제작(文翰製作)은 특히 외교에 소용되었으며, 지공거(知貢擧)는 인재를 발탁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치중한 사업은, 개혁 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인재 육성이었다. 그는 대개 국학(國學)은 풍화(風化)의 원천이요, 인재는 정교(政敎)의 근본이다. 배양함이 있지 않으면 근본이 견고히 될 수 없으며, 소통하도록 하지 않으면 원천이 맑아질 수 없다.”고 일찍이 교육 문제에 본원적 이해를 가지고 주장을 폈다. 그래서 국학, 즉 성균관의 직임을 맡고 직접 강학을 하였을 뿐 아니라, 신예 명유(名儒)들을 성균관에 포진하도록 했던 것이다. 고려사(高麗史)열전에는 그의 인물을 총평하는데, “사문(斯文)의 흥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학자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 받든다.”는 말이 들어가 있다.

 

목은은 이르기를, “문경무위(文經武緯)는 천지의 대도(大道)이다.”라고 하였다. 문과 무를 천지의 대도로써 함께 중시하였지만 문을 기본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 자신은 문경의 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러나 변혁기의 현실은 권력이 무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군사 영웅으로 등장한 이성계(李成桂)에게 힘이 가 있어 급진적인 개혁 그룹이 여기에 합세한 것이다. 위화도 회군을 고비로 대세는 완전히 급진 개혁파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때 목은은 당시 세계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명()과의 외교를 통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 왕조를 붙잡아 볼까 하고 명의 수도 남경(南京)으로 갔다. 1388년 겨울로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목은은 명나라 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을 대면하긴 하였으나 설득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명 황제는 주변국의 입장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목은에 있어 이 마지막 시도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남은 것은 궁액(窮厄)’의 노경뿐이었다. 그 이듬해 귀국하자 곧 문하시중을 사임했을 뿐 아니라, 탄핵을 받고 추방당하는 신세로 몰렸고, 둘째 아들 종학(種學)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일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왕조는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에서 풀어 주었으며, 극진한 예우까지 하였다. 그의 태산 같은 덕망 때문이었다. 새 임금 이성계의 이름으로 그에게 극진한 예우가 베풀어진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가 신왕조의 부름을 받고 새 임금 앞으로 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옛날의 친구인 이성계를 대하자 이 늙은이는 앉을 자리가 없다.” 하며 나왔다고 한다.

 

목은은 조선 태조 569세로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운명하였다. 그의 최후와 관련해서도 미확인의 전설이 따라다니고 있다. 조선 왕조는 그의 죽음에 예관(禮官)을 보내 치제(致祭)를 드리고 부조를 후하게 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했으며, 문정(文靖)의 시호를 내렸다.

 

3. 목은에 있어서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문명의식(文明意識)

-------------이하 한국고전번역원 목은집 해제 참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20A_0090_010_0630_2008_001_XML

 

한국고전종합DB

 

db.itk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