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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2001년 9월~10월 - 을지문덕 우중문에게

雅嵐 2022. 6. 25. 16:33

상기하자! 6.25!!! 그땐 그랬다. 

전쟁기념???관? ㅡ> 전쟁 상기관, 전쟁 기억관.

 

아래 문장들은 우리동네 인헌제 휘호대회 명제들이다.

인헌 강감찬공의 호에서 딴 인헌동이 있고, 유년시절 이름에서 딴 은천동이 있으며 

별이 떨어지는 태몽에서 이름 지은 낙성대와 안국사 사당이 있다.

원래는 4월 관악산 연분홍산철쭉 개화시기를 맞춘 철쭉제도 있었지만 10월 강감찬 장군의 기일에 맞추어 강감찬 축제인 '낙성대 인헌제'로 통합하여 많은 행사를 한다.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지기 시작하는 때 서예도구들을 싸들고 가서 안국사 돌바닥에 엎드려 현장 휘호를 하는 일은 그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제시된 명제를 기본 두 가지 서체로 모두 창작해보았고, 그중 하나는 오래전 창작해보았던 것이지만 새로이 다시 해보았다.

또한 차곡차곡 해나가던 월평회 한 작품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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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동문선 제19 / 오언절구(五言絶句)

()나라 우익위(右翊衛) 대장군(大將軍) 우중문(于仲文)에게[贈隋右翊衛大將軍于仲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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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乙支文德)

 

신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 神策究天文

묘산은 지리에 통달했네 / 窮地理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거니 / 戰勝功旣高

족함을 알아 원컨대 그치시라 / 知足願云止

 

[-D001] 족함을 …… 그치시라 :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知足不辱 知止不殆].”란 말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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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제3임신년 신라 진평왕 34, 고구려 영양왕 23, 백제 무왕 13(수 양제 대덕 8, 612)

7월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의 우문술 등 930만과 살수에서 격전하여 대패시키니, 수주 광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수장(隋將)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 길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 길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길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 길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 길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襄平) 길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 길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成) 길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길로 나와서 모두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술 등은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으로부터 군사를 발()하여 인마(人馬)에게 모두 1백 일분의 양식을 주고 또 무기와 의류천막, 그 밖의 군수품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마다 3() 이상의 무게여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되,

군량[粟米]을 버리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하리라.”

하니, 사졸들이 모두 천막 속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으므로 겨우 중도에 가서 군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는 울지문덕(蔚支文德)’이라고 하였다. 침착하고 지모(智謀)가 있는 데다 겸하여 글을 잘하였다.. 고구려 왕이 중문(仲文)의 진영에 보내어 짐짓 항복하는 척하고, 허실을 탐지하려 하던 차 중문(仲文)이 먼저 수 양제의 밀지를 받았는데, ‘고구려 왕을 만나거나 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아라하였다. 중문이 이를 잡으려 할 때 수의 위무사(慰撫使) 유사룡(劉士龍)이 이를 굳이 제지하니 중문이 그 말을 듣고 문덕을 돌려보냈다. 이윽고 보낸 것을 뉘우쳐 사람을 시켜 속여 이르기를, ‘할 말이 있으니 다시 오라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 돌아왔다.

 

중문과 우문술 등은 문덕을 놓치고는 마음이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하고, 중문은 정예군을 시켜 문덕을 추격하려 하니, 우문술이 굳이 막았다. 중문은 노하여,

장군이 10만 군을 거느리고 적은 적군을 격파치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보겠는가? 군사(軍事)를 결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의견에 좇아야 하는데 지금 사람마다 딴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적을 이기겠는가?”

하니 문술 등이 마지못하여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빛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이를 피곤하게 하려고 싸울 때마다 곧 도망하니, 문술 등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을 이기었다. 술 등은 이 빠른 승첩을 믿고 동으로 살수(薩水 지금의 청천강(淸川江))까지 건너와 평양성에서 근 30리 지점에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 / 神策究天文

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했도다 / 妙算窮地理

전쟁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 勝戰功旣高

족함을 알거든 그만 그침이 어떠한고 / 知足願云止

 

하였다. 중문이 답서하여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는 척하면서 문술에게 말하기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면, 왕을 모시고 형재(行在)에 나아가 조회하리라.”

하니, 문술이, 군사들이 피곤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여 졸지에 함락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문덕의 속임수에 빠져 방진(方陣)을 만들어 물러갔다. 이때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에서 습격하여, 싸우면서 쫓아가다가, 7월 살수에 이르러 수군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수의 후군을 추격하니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고, 여러 군사들이 다 괴멸되어 수습할 수 없었다. 장사들은 도망쳐 1주야 만에 압록수에 이르니, 4백50리50리 길을 간 셈이다. 장군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물리쳤다.

 

고구려군이 백암산(白巖山)에서 설세웅(薛世雄)을 포위하니, 세웅이 분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來護兒)는 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고, 오직 위문승(衛文昇) 1군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구군(九軍)이 요()에 이르렀을 때에는 305천이었는데 돌아갈 때 요동성에 이른 것은 27백 인이었다. 물자와 기계는 거만(巨萬)을 헤아렸는데 송두리째 탕진되매, 수주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구속하였다가 계묘일에 이끌고 돌아갔다. 때에 백제는 또한 국경에서 군사를 정돈하고, 겉으로는 수()를 돕는 척했으나 실은 두 마음[兩端]을 가지고 있었다. 수인들은 이 싸움에서 다만 요수 서쪽의 고구려의 무려라(武厲邏)를 빼앗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었다.

 

최씨는 말하였다.

예부터 전쟁[兵家]의 승패는 군사의 다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장군의 현명함에 있는 것이다. 부진(苻秦 전진(前秦)을 말함. 그 임금 부견(苻堅)의 성을 따서 말함)이 백만 군으로 진()을 쳤을 때 사 현(謝玄)8만의 군사로도 도강해서 한 번 싸우매 진군(秦軍)이 감히 지탱[枝梧]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진()의 군신들이 훌륭한 장수를 얻어서 임기응변하여 승리의 계책을 얻어서이다. 수씨(隋氏 양제(煬帝)를 가리킴)는 천하를 통일하여 그 군사 강함과 나라의 부성(富盛)함이 부진(苻秦)보다 몇 배나 되었으나, 양제가 천하의 군사를 출동하여 한 작은 나라를 정벌하는데 고금을 통해 보아도 군사를 이렇게 많이 동원한 예는 없었다고구려의 계책으로는 속수무책으로 항복을 애걸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인데 을지문덕은 비록 몹시 혼란하고 어수선한 중에서도 조용히 주획(籌畫)하고 틈을 엿보아 힘껏 공격하기를, 마치 마른나무를 꺾고 썩은 나무를 뽑아 버리듯이 함으로써 수() 양제를 대파하고 돌아가게 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게 한 것이다. 대개 고구려의 땅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 데다가 강좌(江左)서릉(西陵)거록(鉅鹿)초성(譙城)비수(淝水)와 같은 요새[形勝]가 없고, 사안(謝安)왕도(王導)와 같이 본래 양성했던 군사도 없었는데 한 평양의 고군(孤軍)으로 천하의 대병을 대적하여 마침내 전승(全勝)을 거두었으니, 사안과 견주어 보더라도 문덕이 오히려 장하다. 문무의 재능이 뛰어나고 지용이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랴! 이후로부터 비록 당 태종(唐太宗)의 신통한 무덕(武德)으로도 안시성(安市城) 싸움에서 뜻을 얻지 못하였고, ()()몽고(蒙古)의 흉악한 무리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크게 해독을 끼치지 못했고, 금산(金山)금시(金始)합란(哈丹)홍구(紅寇)의 군사가 모두 우리나라에서 섬멸되었으니, 천하 후세에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기어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것은 문덕의 남긴 공적이 아니겠는가?”

                                                               ⓒ 한국고전번역원 | 심우준 () | 1977

 

고전번역서 > 명재유고 제3/ ()

이 충무(李忠武) 순신(舜臣) 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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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의 남긴 향기 오래 전해지고 / 雎陽遺響遠

제갈의 큰 명성 높이 솟아 있네 / 諸葛大名高

팔애는 기운찬 날개를 생각하지만 / 八哀思勁翮

한 번 베려하여도 무딘 칼이 부끄럽네 / 一割愧鉛刀

 

장 중승(張中丞 장순(張巡) )이 수양성(雎陽城) 안에서 지은 시 중에 문을 열면 변방의 달이 가깝고, 전쟁이 고달프니 군진의 구름이 깊네.門開邊月近 戰苦陣雲深라는 구절이 있는데, 장군(將軍)의 이 시와 더불어 의사(意思)가 똑같다. 제갈 승상(諸葛丞相)은 시호가 충무(忠武)인데 장군의 훈업(勳業)도 마땅히 큰 명성을 그와 똑같게 받아야 한다. 국가가 남쪽과 북쪽에서 적병(敵兵)의 침입을 당하여 그 원수와 치욕을 아직 씻어 내지 못하였으니, 장군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세월이 오래 지나더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세상에 쓸모없는 선비들이니 곧 무딘 칼이나 마찬가지다. 만일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 적군 한 명이라도 베어 죽이는 일에 쓸모가 있겠는가. 너무도 감개한 나머지 심정이 말에 드러났다.

원운(原韻)

수국에 가을 경치 저무는데 / 水國秋光暮

기러기는 진영에 높이 나네 / 驚寒鴈陣高

나라 걱정에 잠이 안 오는데 / 憂心輾轉夜

새벽달이 활과 칼에 비추네 / 殘月照弓刀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동현 () | 2006

 

고전번역서 > 상촌선생집 제60/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의주(義州) 통군정(統軍亭)은 세 나라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경치가 장관이니 온 세상에서 다 찾아보아도 그 짝을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시인들이 이곳을 주제로 읊은 시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형세와 기상을 제대로 표현한 경우는 있지 않았다. 그런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연소한 나이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절구 한 수를 짓기를,

 

내가 강을 건너가서는 / 我欲過江去

곧바로 송골산에 오르고 싶네 / 直登松鶻山

서쪽에서 화표주(華表柱)의 학 불러 내다가 / 西招華表鶴

구름 속에서 서로 한 번 놀아보려네 / 相與戲雲間

 

이라 하였는데, 이 시가 대작(大作)은 아니라 하더라도 스스로 기발하여 뒤에 전할 만하다 하겠다. 그 뒤에 시인 묵객들이 와서 읊은 것 가운데 이런 정도의 수준을 보여주는 시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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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12. 26 율곡선생 산중 - 자전 전고

山 中                             栗谷 李珥 採藥忽迷路 채약홀미로 千峰秋葉裏 천봉추엽리 山僧汲水歸 산승급수귀 林末茶烟起 임말다연기 약을 캐다가 문득 길을 잃으니 천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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