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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탁 행서 - 멸치 한 박스

雅嵐 2023. 9. 21. 08:25

지하실에서 글씨를 내오는 중이다.

버릴 것 한 박스를 만들어 놓으니 개운하다.

아직도 남현동서예교실 회원들의 연습작품과 체본이 남아 있다.

강감찬축제 전시를 대비하여

아마도 수정해드리거나 작품을 골라내고 남은 것이거나

간혹 서예교실 뒷정리를 하고 나오다 내 체본을 발견해서 들고 나온 것들인 게다.

그게 마지막 수업이었다.

 

대학원 1학년 1학기 때 과제로 해간 왕탁 행서도 한 무더기 나온다.

왕탁전집에서 골라서 다섯 번 이상 쓰고 그중에 다섯 장을 골라 과제 검사를 받았었다.

또 멸치 한 박스야...

누군가 눈에 웃음기를 띠며 살그머니 내게 속삭였다.

역시 멸치 한 박스였다.

내 글씨를 넘겨보시더니 시작하시는 교수님 이야기다.

부인과 관광을 갔다가 아랫녘 바닷가 큰 시장을 가게 되셨단다.

상인이 보여주는 멸치를 보고 빛깔도 좋고 크기도 좋아서 한 박스를 대전까지 사들고 오셨는데...

열어서 조금씩 꺼내 다듬다 보니 위에만 한 겹 고급멸치고 속은 모두 누렇고, 크기나 질이 떨어지는 멸치였었다는 예를 들으셨다.

하시고 싶은 말씀은 

검사받는 표면 글씨는 아주 좋은데 넘기니 질이 떨어진다는 말씀이시다. 멸치 한 박스.

 

얌전하고 정직한 글씨만 쓰다가

학교에서 왕탁행서를 휘두르려니 이만저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기세에 관한 지적을 받고 열 몇 번을 써도 쓸수록 더 큰 부담이 손을 굳게 만들었다.

내가 나 몰래 집에 있는 오래된 그리고 적은 양으로 단 번에 어지러운 술을 나에게 먹였다.

취권도 있으니 취서라면 왕탁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 쓴 것 중 멸치 한 박스처럼 자랑스럽게 취한 글씨를 맨 위에 올려 검사를 받았다.

그날도 멸치 한 박스... 말씀 뒤에 맨 뒤에까지 휘익휙 넘겨 보시더니

"못써" 호통을 치신다. "안뒤+야~!"

앗! 어떻게 아셨을까.

할 수 없이 고백을 했다.

왕탁 글씨는 보이는 것처럼 마구 휘둘러도 안되는 글씨라고 하셨다.

하루 임서 하루 창작. 

왕탁의 조상인 왕희지와 지영의 글씨를 오래 임서하고 나오는 왕탁 자신의 글씨.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휘두름을 진의 없이 함부로 흉내만 내서는 안되는 것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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