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자방고전 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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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우리동네

어머니와 아들

雅嵐 2024. 8. 30. 06:45

새벽

날이 미처 새기도 전에

아침을 깨우는 풍경이 달라졌다.

 

중학교때

미국에 자주 다니시는 교장선생님께서는 주말 운동장 예배때 많은 신문물을 이야기해 주셨었다.

물건마다 바코드를 새기고 돈과 지갑 대신 우리들의 손목에 바코드를 새길 것이라고 하셨었다.

그때 '오멘'이라는 영화가 나왔었는데 

정수리에 새긴 666 숫자만이 기억에 선명했고 그것이 바코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에는 거리에 온통 깡통줍는 노인들 뿐이라고 하셨었다.

 

빠가각빠가각

잘 묶어 내놓은 봉지들을 모두 쏟거나 해체하거나 심하게는 맨 아래를 부~욱 뜯어 깡통을 찾는다.

사정없이 발로 우그리는 소리... 살살하시지 연골이 상할까 걱정된다. 그런 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깡통값의 몇 배를 수술비로 쓰게 되었다.

배낭을 메었거나 자전거를 타고 운동삼아 다닌다.

어떤 분은 자석을 갖고 다니신다. 붙는 것은 안가져간다. 안붙는 알미늄캔만을 찾는다.

 

박스폐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도 거들떠도안본다. 폐지 안해요!!!

비를 맞고 주저앉는 박스더미는 이제 아주 흔히 보는 풍경이다.

종이가 많이 나오는 우리집.

모아 내놓으면 속에 뭐가 있을까 거꾸로 털기 일쑤고 작은 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면 쓸기도 쉽지 않다.

 

신문 한 수레를 가져가면 5천원을 주었던 때가 있었다.

아이 친구 엄마가 내가 하던 일을 대신해주었었다. 폐지가 모아질 무렵이면 그렇게 정담도 나누고 집밥도 함께 먹고 했었다.

아들의 큰소리와 눈에 웃음기를 띠고 두손으로 아들의 한 팔에 의지해 아들의 폐지수레를 따라 다니던 어머니도 있었다. 아들의 큰소리는 늘 어머니에게 탐을 내지 말라거나 야박하게 하지 말라거나... 그런 큰소리였고 그 어머니는 아들보다 먼저 폐지수거를 했던 분 같았다. 한 수레 가득 싣고 지나가지만 빈 박스를 얼기설기 얹어 가끔 횡단보도에서 쏟기도 한다. 그렇게 그분은 눈은 퀭하니 점점 우묵해지고 땡볕 여름에 더 까맣고 빼빼 말라갔다. 남들 한 번이면 될 양을 얼기설기 열 번도 더 다니는 까닭이다. 어머니는 이제 요양원에 계시다 했고 아들은 동네 종이다루는 곳에서 채용을 한 듯하다. 이제 그분도 지나가지 않는다.

 

우리집 폐지가 자주 산더미가 되어간다.

문득 직접 끌고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거슬린다.

폐지 할머니 한 분을 다시 섭외했다. 바쁘시다. 여기와 길건너 두 슈퍼마켓에서 오전오후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소규모마켓은 1일부터 말일까지 물품을 말일 기준으로 정산하기 대문에 1일부터 5일은 물건이 폭증하고 박스도 폭증한다. 조금있으면 추석 박스도 대란일게다. 빨리 정리해야 한다.

수레 위에 살그머니 메모를 얹고 왔다. 며칠 기다리다 다시 가고 다시 출근시간을 알아내 또 갔다.

 

어둑해지는 저녁 할머니의 수레 앞에서 퇴근한 아들과 실랑이를 한다.

아마도 땡볕 무더위에, 에~또~ 이런일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지가 돈을 줄 건가? 지가 죙일 나랑 놀아줄건가?  종일 빈 컴컴한 집에서 혼자 우두커니 있느니 사람들도 만나고 적당히 운동도 하고 돈 쫌 생기면 반갑고 그런거 아니예요?

내게 응원을 구한다. 

 

여덟박스예요. 잘 꾸려두었으니 다녀가셨으면 좋겠어요. 또 부탁을 했다.

추석 전에, 6시 고물상 마감 끝나고 시간날 때 다녀가시마 했다.

내겐 한밤중 대문종이 울린다. 짐작만 하고 확인 없이 문을 땄는데 누가 같이 서 있다. 잠시... 아니다. 아들인 것 같다.

길에서 폐지하지 말라고 소리지르며 말리던 그 아들같다.

퇴근하고 어머니의 폐지를 도우러 함께 수레를 끌고 왔다.

 

눈물이 피~잉 돌게...

고맙다.

 

칸나는

무궁화처럼

피고지고 피고 또 핀다.

 

 

지난 주에는 온 집안에 마늘냄새가 진동하더니

이번 주에는 나갔다 들어오면 향긋한 포도쥬스 냄새가 났다.

포도를 으깨 끓이고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발효하면 실패없이 발사믹식초를 만들 것 같다.

포도나라에서 만드는 것을 보았는데,

알따서 깨끗이 씻어 끓이니 너무 맛있는 쥬스가 되어서 한 컵 또 한 컵 줄어가는 중이다.

식초 만들 것이 남을지 모르겠다.

 

청포도는 다 익은 때를 가늠하기 어렵다.

포도알에 햇빛이 맑게 투과하면 그때를 알기도 하는데

더 빠른 것은

새들이 알맹이를 콕 찍어 빼먹고 꺼풀만 남기는 때이다. 

걔들이 다 먹으면 안될 것 같다.

 

이제 온 집안에 멸치냄새가 진동한다.

주부생활은 하루종일 콩쥐같은 일만 하는 것 같다.

 

이제 

하는수없이

붓을 담가 다시 빨아 걸고 먹물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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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송혜희를 찾아주세요" 송길용씨.

그분이 안계셔도 찾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