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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 30 - 한자 이름 읽기

雅嵐 2025. 1. 13. 17:57

한자의 음을 찾아보면

여러 음으로 읽는 경우가 있다.

옛 서적을 읽다가 인명이 나오면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심하게 된다.

지명 인명 한자 읽기는 한국어문회 한자 2급 대상이다.

흔히 쓰이는 한자는 인명으로 읽을 때는 달리 읽음이 원칙이다.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세로로 쓰는 한문의 특성상 인명은 달리 읽는다.

여기 고민거리가 있다. 

한단이라는 지명이 있고 한단순이라고 읽는다고 그냥 넘어갔는데

강감찬(姜邯贊)으로 읽으니 말이다.

두도(杜度)는 두탁으로 읽고싶다.

색정(索靖)이라는 인물도 나중에 나올 것인데, 삭 색 소 중에 소정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름은 고귀하게 여겼으므로

훈음 중에서 흔하지 않고 좋고 귀한 뜻의 음으로 읽음이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자가 있고 호가 있고 명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털 다음의 로고가 오늘 껌껌한 한가지 색으로 변했다.

나라 상황처럼...

 

원문

旣常俗所存, / 不藉編錄. 至於諸家勢評(1), 多涉浮華, 莫不外狀其形, 內迷其理. 今之所撰, 亦無取焉.

若乃師宜官(1)之高名, 徒彰史牒(2), 邯鄲淳(3)之令範(4), 空著縑緗(5). 曁乎崔杜(6)以來, 蕭羊(7)己往, 代祀緜(8), 名 / 氏滋繁

 

해석

제가들의 평론은 대부분 겉만 화려하고 실속이 없다. 밖으로 형태를 형상하고, 안으로 이치에 미혹되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 지은 것 또한 여기에서 취함이 없다.

사의관과 같은 고명한 사람도 단지 사책에만 드러났고한단순의 양호한 전범은 공허하게 서책에 나타났다최원두도 이래 소사화양흔 이전까지 대대로 멀리까지 이어졌고유명 서예가들은 증가하였다.

 

주석

(1) 勢評(세평) : ‘()’는 권세나 위세의 뜻이니 여기에서는 영향력이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평(勢評)’은 영향력 있는 평론을 가리킨다. 또한 최원의 초서세와 채옹의 구세와 같은 ()’와 원앙의 고금서평과 같은 ()’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암암리에 이를 가리킨 것 같다.

 

(1) 師宜官(사의관) : 사의관(師宜官, 생졸미상)은 동한시기 영제 연간(169-188) 사람으로 예서를 잘 썼는데, 큰 글씨는 지름이 한 길이고, 작은 글씨는 사방 1촌에 천 글자를 써서 고금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일컫는다.

(2) 史牒(사첩) : 사책(史冊)으로 진서은일전신밀에서 백이는 나라를 떠났고, 개자추는 상을 피한 것이 모두 사책에 나타나 전함이 무궁하였다.라고 하였다.

(3) 邯鄲淳(한단순) : 한단순(132-221)에 대해 장회관은 서단에서 한단순은 자가 자숙이고 영천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맑고 깨끗하며, 재주와 학문은 통하고 영민하였다. 처음에 임치왕의 사부가 되었다가 급사중으로 옮겼다. 글씨는 팔체가 모두 공교하였는데, 조희를 스승으로 삼았다. 특히 고문대전팔분서예서에 정통했다. 두림위밀 이래로부터 고문은 자취가 없어졌는데, 한단순으로 말미암아 다시 나타났다. 위항은 이르기를 위나라 초에 고문을 전하는 것은 한단순에게서 나왔다. 채옹은 이사조희의 법을 채용하여 고금의 잡된 형태를 이루었지만, 정밀하고 한가로운 이치는 한단순만 같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4) 令範(령범) : 양호한 전범으로 남조 양나라 소통은 문선금대서십이월계협종이월에서 만세의 좋은 법규를 이루니, 실로 백년의 양호의 전범이다.라고 하였다.

(5) 縑緗(겸상) : 서사용의 엷은 황색 가는 비단으로 널리 서책(書冊)을 가리킨다. 당나라 안진경은 송신자서에서 아깝도다! 엷은 황색 가는 비단에 곤란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끼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6) 崔杜(최두) : 최원과 두도를 가리킨다.

최원(崔瑗, 77-142)은 동한시기의 서예가로 후한서최원전에서 최원은 자가 자옥이고 문사에 뛰어났으며, 특히 서기잠명을 잘 써서 부송을 지었다. 초서세7언으로 무릇 57편이다.”라고 하였다. 장회관은 서단에서 최원은 자가 자옥으로, 안평 사람이다.……문장은 세상을 덮었고, 장초서를 잘 썼으며, 두도를 스승으로 삼아 점과 획 사이에 조화롭고 유창하지 않음이 없었다.……원앙이 이르기를 마치 높은 산봉우리가 해를 가리고, 외로운 소나무의 한 가지와 같다.’라고 하였다. 왕은은 그를 초현이라 일컬었다.……최원의 장초서는 신품에 들었고, 소전은 묘품에 들었다.”라고 하였다.

두도(杜度, 생졸미상)는 동한시기 서예가로 장회관은 서단에서 후한의 두도는 자가 백도이고 경조두릉 사람이다. 어사대부 두연년의 증손이다. 장제 때 제나라 승상이 되었는데, 장초서를 잘 썼다.……소자량은 이르기를 본래 이름은 였는데 위 무제를 휘하여 로 고쳤다.’라고 하였는데, 아니다. 채옹의 권학편에서 말한 것에 의하면, ‘제나라 승상 두도는 아름답게 명편을 지켰다.’라고 하였다. 한나라 중랑이 미리 무제를 위해 휘한 것은 마땅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7) 蕭羊(소양) : 소사화와 양흔을 가리킨다.

소사화(蕭思話, 406-455)는 난릉(蘭陵, 지금의 산동성 嶧縣) 사람으로 벼슬은 정서장군에 이르렀다. 그의 서예는 전적으로 양흔을 스승으로 삼아 체세를 본받았다. 비록 기이한 봉우리가 벽에 선 것 같은 빼어남은 없지만 풍류에 따라 쓴 글씨는 먹물이 솜을 이은 것처럼 달리며 글자의 형세가 강하여 영웅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양흔(羊欣, 370~442)은 자가 경원(敬元)이고 태산남성(泰山南城, 지금의 산동성 費縣의 서남쪽)사람으로 벼슬은 중산대부의흥태수에 이르렀다. 그는 왕헌지에게 친히 서예를 전수받았다. 어느 날 왕헌지가 양흔의 집에 가니, 새 비단치마를 입고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을 보고 치마 위에 글씨를 몇 폭 써주고 돌아갔다. 양흔의 서예는 이로 인하여 더욱 정진하였고, 체세는 왕헌지를 얻었다. 그의 해서는 왕헌지 이후 독보적이었고, 공림지소사화범엽과 함께 사묘(四妙)’라 일컬었다.

(8) 묵적본이현사에는 ’, 사고본호남본에는 綿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綿은 같은 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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