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豈惟(2)會古通今, 亦乃情深調合. 致(3)使摹榻日廣, 研習歲滋, 先後著名, 多從散落, 歷代孤紹, 非其效歟.
試言其由, 略陳數意, 止如樂毅論(1), 黃庭經,(2) 東方朔畫讚,(3) 太師(4)箴,(5) 蘭亭集序,(6) 告誓文,(7) 斯並(8)代俗所傳, 真行(9)絕致者也.
寫樂毅則 ~
【해석】
어찌 단지 옛것을 모으고 지금을 통하며, 또한 정감이 깊고 조화를 합하였겠는가? 임모와 탑본으로 날로 넓혔고, 연습한 세월은 불어났다. 앞뒤로 유명한 이가 대부분 흩어지고 없어졌다. 역대로 홀로 이었으니, 그 효험이 아니겠는가?
시험 삼아 그 연유를 말하고, 대략 몇 가지 뜻을 진술하겠다. <악의론> <황정경> <동방삭화찬> <태사잠> <난정집서> <고서문>과 같은 것들에 그치나 이는 함께 대대로 세속에서 전해지고 해서와 행서의 절묘에 이른 것들이다.
【주석】
(2) 묵적본ㆍ사고본ㆍ호남본에는 ‘惟’, 이현사에는 ‘唯’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3) 묵적본ㆍ이현사ㆍ호남본에는 ‘致’, 사고본에는 ‘至’라 하고 아래에 ‘改作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1) 樂毅論(악의론) :
왕희지의 소해서로 심괄은 『몽계필담』에서 “왕희지의 글씨로 옛날에 전하는 것은 오직 <악의론>만 왕희지가 친히 돌에 썼고, 기타는 모두 종이ㆍ비단에 전해졌다. 당 태종은 ‘이왕’의 묵적을 모으는데, 오직 <악의론>만 석본이어서 이후 태종을 따라 소릉에 들어갔다.
주량 때 요주절도사 온도가 소릉을 발견하여 이를 얻어 다시 사람 사이에 전해졌다. 혹자는 공주가 가짜로 이를 바꾸어 원래 묘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송나라에 고신학사의 집에 들어갔다. 황우 연간(1049-1054)에 고신의 아들 고안세는 전당주부를 지냈는데, <악의론>이 집에 있어 내가 일찍이 이를 보았다. 당시 돌은 이미 깨지고 이지러졌으며, 끝 뒤에 단지 ‘海’ 한 글자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 그의 집은 이후 10여 년 고안세는 소주에 있었고, 돌은 이미 깨져 몇 조각이 되어 철로 묶었다. 이후 고안세가 죽자 돌의 소재를 몰랐다. 혹자는 소주의 어떤 부잣집에서 이를 얻었다고 하였다. 또한 다시 보지 못하였다.
지금 전하는 <악의론>은 모두 모본으로 필획에 다시는 옛날의 맑고 굳셈이 없다. 왕희지의 소해서는 이에 거의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구양수의 『집고록발미』와 조명성의 『금석록』의 기록은 이와 다른 점이 있다. 조명성은 『금석록』에서 “구양수가 이르기를 “<악의론> 돌은 고신학사의 집에 있었다. 고신이 죽자 일을 좋아하는 자가 종종 나아가 검열하다가 혹 모본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고신의 집에서 비밀리 소장하자 점차 얻기 어려웠다. 이후 그의 자제가 그 돌을 부잣집에 저당 잡혔고, 부잣집이 화재가 나자 마침내 그 돌이 불타서 지금은 다시 석본이 없다.”라고 하였다. 『집고록발미』에서 말하길 “<악의론> 돌은 이미 불탄 것은 아니다. 연우 연간(1086-1094)에 옛날 낭관이었던 조송이 항상 휴대하고 수행하였다가 이미 잘라져 갈라지자 목갑에 저장하였다. 조송은 더욱 진중하게 아끼며 친구에 먹본을 구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손으로 모륵하여 남겨 주었다. 조송이 죽자 지금은 마침내 소재를 모른다.”라고 하였다.
왕주는 『죽운제발』에서 “왕희지의 <악의론>은 필세가 정묘하여 부드러운 것 같거나 강한 것 같고, 근엄한 것 같거나 표일한 것 같다. 형자후가 이미 순박하고 또한 면밀하며, 따뜻하면서도 두렵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2) 黃庭經(황정경) :
<환아경(換鵝經)>이라고도 한다. 낙관은 없고, 끝에 ‘356년 5월[永和十二年五月]’이라는 서명이 있으며, 왕희지가 썼다고 전해진다. 소해서로 60행이다. 저수량은 왕희지의 글씨라 정하고 『우군서목』에서 정서의 두 번째로 나열하였다.
구양수는 『집고록발미』에서 “<황정경> 1편은 진나라 영화 연간(345-356)의 각석으로 세상에서는 왕희지의 글씨라 전한다. 글씨는 비록 기쁠 수 있지만 필법은 왕희지가 쓴 것이 아니다. <황정경>이란 것은 위ㆍ진나라 때 도사가 양생하던 글이었다.”라고 하였다. 동유(董逌)는 『광천서발(廣川書跋)』에서 “세상에서 <황정경>은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라고 의심하는데, 전하는 것으로 고찰하면 일찍이 <도덕경>을 썼지 <황정경>이라 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백이 이르기를 ‘<황정경>을 거위와 바꾸었다는 말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스스로 <황정경>을 써서 왕헌지에 준 것이지 도사를 위해 이를 쓴 것이 아니다. 도홍경이 이르기를 ‘왕희지의 유명 묵적은 몇 점에 지나지 않는데, <황정경>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도홍경은 서예를 논함이 가장 정미하여 마땅히 오류가 아닐 것이다. 지금 세상에 전하는 석본의 필획은 오히려 왕희지의 기타 글씨에 미치지 못한다.……지금 보이는 것은 단지 후세에 다시 탁본하고 겹친 모본으로 진짜를 얻지 못함이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3) 묵적본ㆍ사고본ㆍ이현사ㆍ호남본에는 모두 ‘讚’이라 하였으나 이는 마땅히 ‘贊’이어야 한다. 왕승건의 <필의찬>과 안진경의 <동방삭화찬>에서도 모두 ‘贊’이라 하였다.
찬(贊)’은 문체의 하나로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거나 칭송할 때 사용한다. 이는 ‘송(頌)’과 성격이 같아서 제사에 쓰던 송축사로 신명에게 고하던 것이다. 후대에 오면서 점차 성격이 달라져 신명에게 고하는 것은 도외시되고 인물의 덕을 찬미하는 데로 흘렀다. ‘찬(贊)’은 한나라 사마상여가 형가의 찬을 지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를 모방하여 찬을 짓는 사람이 많았고, 당나라에서는 이것으로 과거까지 보았다. 각 구절은 4언으로 격구(隔句)하여 운을 다는 운문으로 짓는 것이 상례이다. 찬의 종류에 대해 서사증은 『문체명변』에서 인물ㆍ문장ㆍ서화 등을 찬미하는 잡찬(雜贊),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의 덕을 기리는 애찬(哀贊), 인물을 포폄하여 논평하는 사찬(史贊) 등 3가지로 나누었다.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은 왕희지가 썼다고 전하는 소해서를 가리킨다. 동유는 『광천서발』에서 “<동방삭화찬>은 세상에서 진나라 우장군이었던 왕희지의 글씨라 전한다. 필묵의 지름길을 고찰하면 문득 같지 않아 후인이 써서 왕희지를 의탁하여 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옛날 왕몽의 아들 왕수가 일찍이 왕희지에게 글씨를 구하자 왕희지는 <동방삭화찬>을 써서 주었다. 왕수(자는 敬仁)가 죽자 그의 모친은 평생 아꼈던 것을 보고 모두 내관에 넣었던 까닭에 이 글씨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정관(627-649)에 글씨를 구입함으로부터 개원(713-741)에 수집하고 방문함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미 다하였다. 왕희지의 글씨를 교정하여 2권으로 만들었는데, <황정경>이 첫째, <동방삭화찬>이 둘째, <고서문>이 셋째였다. 위정은 <동방삭화찬>을 가짜 묵적이라 하였다. 대저 <동방삭화찬>은 이미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온 것은 가짜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4) 묵적본ㆍ이현사ㆍ호남본에는 ‘師’, 사고본에는 ‘史’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5) 太師箴(태사잠) : 왕희지가 썼다고 전하는 소해서로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이 작품은 저록에 드물게 보이고, 지금은 전해지는 본이 없다. 소연은 『답도은거논서』에서 “<악의론>은 조금 굵고 굳세어 아마도 진적이 아닌 것 같다. <태사잠>은 작고 다시 모나면서 아리따우며, 필력은 지나치게 여리고, 서체는 괴팍하다.”라고 하였다. 지영은 「제우군악의론후」에서 “도홍경이 이르기를 ‘<대아음> <악의론> <태사잠> 등은 필력이 드물게 아리따우며, 종이와 먹은 맑고 새롭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6) 蘭亭集序(난정집서) : 왕희지의 행서로 또한 <난정서(蘭亭序)> <난정연집서(蘭亭宴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 <계첩(禊帖)>이라고도 일컫는다. 동진시기 영화 9년(354) 3월 3일에 썼다. 하연지는 「난정기)」에서 “<난정서>라는 것은 진나라 우장군 회계내사인 낭야의 왕희지(자는 일소)가 쓴 시의 서문이다.……왕희지 또한 스스로 이 글씨를 진귀하게 아끼고 보배처럼 소중히 여겨 남겨서 자손에게 주었다. 전하여 7대손 지영에게 이르렀다.……그 글씨를 제자인 변재에게 주었다. 당 태종은 이를 듣고 소익에게 계책으로 취하도록 하여 대내에 들였다. 태종이 죽자 명을 남겨 소릉에 들이라 하여 진적이 마침내 없어졌다. 태종은 처음 진적을 얻자 공봉의 탁서인 조모 한도정 풍승소 제갈정 등 4명에게 명하여 각각 몇 본을 탁본하여 태자 이하 제왕과 근신들에게 하사하였고, 사람 사이에서는 드물었다.”라고 하였다.
(7) 告誓文(고서문) : 왕희지가 쓴 소해서로 동유(董逌)는 『광천서발(廣川書跋)』에서 “<고서문>은 지금 『진서ㆍ전』에 들어있다. 개원 연간(713-741)에 이 글씨를 윤주의 와관사 강당 치미에서 얻었다.……천하의 기이한 작품으로 이연업은 이를 기왕에게 바쳤다. 12년에 기왕의 집이 불탔으니 마땅히 세상에 전함을 얻지 못하였다. 지금 비의 글씨를 새긴 획은 지나치게 엄중하여 다시 이전 법도가 없어 마치 당나라 의 묘한 솜씨로 탁본한 모본을 전한 것 같다.……이 본은 하나가 아니니, 모본을 전하여 서로 계승하였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분별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8) 묵적본ㆍ사고본ㆍ이현사에는 ‘並’, 호남본에는 ‘幷’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9) 묵적본ㆍ이현사ㆍ호남본에는 ‘行’, 사고본에는 ‘得’이라 하고 아래에 ‘改作行’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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